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9
아름답지 않은 너를 위해

감옥에서 탈출해 들어선 왕궁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궁인 A
도망쳐! 궁이 무너진다!
궁인 B
기사단! 기사단을 불러들여라!
궁인 C
왕께서는 어디 계신가! 무사하신지 확인해야 한다!
크리스텔
난리통이 따로 없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나?
벽면에 간 금의 모양새를 보건대, 당장 무너져 내려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아.
근위대원 A
왕녀님이 역병에 잡아먹히셨다!
근위대원 B
근위대 전 인원은 화원으로 집결하라!
왕녀라면 에데를 말하는 거지?
역병에 잡아먹혔다니…
크리스텔
…에데…
…화원이라면 아까 그곳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단장이여, 화원의 위치를 기억하나?
…아니.
크리스텔
칫… 큰일이군. 이런 와중에 누굴 잡고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는데.
움직이는 석상
…
크리스텔
으응…?
…저 석상, 어디로 가는 거지?
대화는 통하지 않지만…
마치… 길을 안다는 것 같은걸.
따라가자.
뭔가에 홀린 듯이 나아가던 석상은 익숙한 문을 열어젖힌 뒤 우뚝 멈춰 섰다.

에데
…
크리스텔
…
에데여. 지금 그대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군.
처음 보는 옷차림으로 화원 한복판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에데가 눈을 마주쳐왔다.
그녀의 옷과 손, 창에는 온통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칠하고 있었다.
에데, 그 피는…
에데
…
에데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화원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피투성이가 된 궁인과 기사들이 마치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크리스텔
그대가 저지른 짓인가?
에데
…
크리스텔
역병에 먹혔다는 표현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었군.
단장이여, 아무래도 저건 이미 우리가 알던 에데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야?
크리스텔
…에데의 심장에서 강력한 공허의 힘이 느껴지거든.
필시 모르세르가 한 짓이겠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아니, 에데 쪽이 먼저였나.
어쩌면,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던 게 에데의 몸에 봉인되어 있던 공허의 힘이 풀려나던 징조였을 수도.
어느 쪽이든, 지금의 에데에게는 이성이 없어.
대화라도 할 수 있도록 돌려놓으려면…
무력으로 때려눕힐 수밖에.
…곧 공격해 올 테니, 준비하게.
에데
…시끄러워. 머리 아파. 닥쳐.
…그냥 다 죽어버려.

크리스텔
큿…!
괜찮아?!
크리스텔
…문제없네. 비켜 맞았으니 얕은 상처만 입었을 뿐이야.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은 몰랐는데… 놀랍군.
하지만, 결국 전투의 승리는 이 크리스텔이 쟁취했다.
자, 에데여. 이제 어쩔 텐가?
아무리 그대가 힘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어느 날 갑자기 얻은 힘을 능숙하게 다룰 수는 없어.
에데
…응. 내가 졌네.
상관없어.
승리도, 패배도… 이 삶도…
전부 부질없는 것들뿐이니까.
에데, 정신이 돌아왔구나!
얼른 빠져나가자. 곧 왕궁이 무너져.
에데
…하아. 단장은 눈치가 없구나. 아직 모르는 거야?
이 공허가 내 몸을 반쯤 잡아먹긴 했지만…
너희들이 여기 도착했을 때쯤에는 이미 제정신이었어.
크리스텔은 중간에 눈치챈 것 같던데.
크리스텔
…그래. 이성을 잃은 것 치고는…
공격을 망설이는 것이 눈에 보였거든.
뭐…? 그럼…
에데
너희들을 공격한 거?
…물론 내 의지였어.
어째서…
크리스텔
…죽여주길 바랐나? 나와 단장이 직접?
에데
…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를 갖지 못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죽으려고 했다고…?
에데
그 말대로야.
…어차피 이미 사토에 파묻혀 사라졌어야 할 몸이야.
이제 와서 죽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지.
복수는 어쩌고?
에데
복수…? 푸흣…
…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전부 떠올랐어.
내가 누구인지, 어쩌다가 왕국이 멸망했는지…
나에게 복수 같은 건…
…할 자격이 없다는 것까지 전부.
크리스텔
복수를 할 자격이 없다…?
에데
이 모든 광경을 봐. 저들을 죽인 건 모르세르가 아니라 나야.
정신을 잃은 내가 직접 그들을 찌르고, 찢고, 베어 죽였어.
내 안에서 꽃을 피워버린 이 힘은 나를 잡아먹고 날 괴물로 만들어버렸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을, 나를 아껴주던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왕국을 파괴했어.
내 안에 씨앗을 심은 건 그 녀석이지만…
결국 왕국을 무너뜨린 건 나라고.
그게 내가 잊었던 기억이야.
크리스텔
…에데여. 그게 그대가 닿은 진실인가?
에데
…그래.
내 기억이 사라졌던 이유…
그건, 내가 저지른 이 모든 짓을 잊고 싶었기 때문일 거야.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이건 모두 현자의 탓이라고 현실을 부정하면서, 도망친 거야.
추하고, 못난 범인은 결국 자신의 기억마저 봉인한 채 폐허에 묻혔지.
그리곤 우습게도 뻔뻔하게 복수를 외치고…
이젠… 전부 됐어.
정말 모든 게… 의미 없어졌으니까.
충격적인 말을 내뱉은 에데는 풀썩 주저앉아 부러진 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곤 창끝을 자신에게 겨눴다.
튕겨 나간 창대가 힘없이 날아가 땅에 박혔다.
에데
너…
…방해하지 마. 그러다 죽는다고.
내 안에 심어진 공허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라고.
다시 폭주하기 시작하면 더는 내가 제어할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싫다!
에데
…대체 뭔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결정이야.
내가 죽든 말든, 네 알 바 아니잖아.
고작 하루 정도 같이 있었다고 뭐라도 된 듯이 굴지 마.
난 복수 그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런데… 이제 그것마저 없어졌어.
그러니까 이젠 원래 그래야 했던 대로… 되돌릴 뿐인 거야.
난 이미 약속했어.
너희를 돕겠다고.
에데
그러니까,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주제 넘게 관여하지 말란 말이야!
맞아. 난 아무것도 몰라.
그럼 내 멋대로 구해주마.
에데
…왜? 어째서?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다른 결말을 보고 싶으니까.
에데
너, 바보야…?
겨우 그런 이유로 이런 억지를 부린다고?
주저앉아 있던 에데의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에데
…!
분명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건 이제부터 생각하면 돼.
에데
아니야… 이건… 내 기억이…
이런 일은 있었던 적이…
복수가 의미 없어졌다고? 상관없어.
에데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그런…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럼 다른 의미를 찾으면 그만이잖아.
에데
……
어째서… 왜 하필 지금…
전부… 전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맺힌 에데가 울먹거렸지만, 이쪽도 더 이상 사정을 봐줄 수는 없다.
왕궁이 무너지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다리가 풀린 에데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크리스텔
…역시, 이렇게 되는군.
아쉽지만 에데를 데리고 돌아갈 수는 없네. 단장이여.
뭐? 어째서…?
크리스텔
에데는, 여기서 죽어야 하니까.

나와 에데를 향해, 크리스텔의 총구가 겨눠져 있었다.
크리스텔
단장, 에데를 두고 물러서게. 이대로 있으면 단장을 쏠 수밖에 없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크리스텔
단장이여, 지금 에데의 몸에는 공허가 심어져 있다네.
그리고 그 공허의 씨앗을 심은 것은 모르세르지.
그렇지, 에데여? 그대도 알고 있을 터인데.
에데
…그래.
크리스텔
단장이여. 우리의 당초 목적을 모른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
내 오른쪽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네.
이미 완전히 공허의 힘에 잠식되어 있으니 도리어 공허체의 그것에 가깝지.
에데
정리하자면 이 시대에 존재하는 현자를 잡아서 녀석의 공허를 크리스텔의 능력으로 분석한다.
그럼 현재 모르세르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크리스텔
비록 현자 본인은 찾지 못했지만, 본질은 놈이 남긴 공허.
그것은 지금, 에데의 안에 꿈틀거리고 있고.
인간의 몸에 공허를 심고, 그 힘을 배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힘이 숙주를 지배했을 때 비로소-
에데
…왕국의 멸망이 찾아온다.
아마… 그게 잊혀졌던 왕국의 최후.
크리스텔
그러니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자명한 것.
에데를 죽이고, 공허를 취한다.
너… 그럼 아까 말하려던 게…
크리스텔
내 예상이 맞다면 에데는…
나는 에데를…
……
…그래. 하지만 심증일 뿐이라 구태여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었지.
그 심증은, 이제 확신으로 변했고.
하지만… 동료잖아!
크리스텔
동료…라.
그런가. 그렇게 보였던 건가.
그렇다면 그대는 내 연기에 속아 넘어간 거야.
연기…?
크리스텔
그래. 전부 연기이고, 가짜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에데를 이용했네. 좋은 사람으로 가장하고 마음에도 없는 따뜻한 말을 건넸지.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 보이도록 유도하고, 억지로 웃음도 지었어.
하지만 그건 전부 진심이 아니었다네. 나는 그런 사람이야.
…
크리스텔
실망했나 단장? 내가 이런 악인이라서?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네.
처음부터 난… 이런 껍데기뿐인 인간이었으니까.
에데를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에도 이미 그랬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가짜이고 허울일 뿐.
나 같은 건…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지 않으면 안 돼.
나에게는,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가족도, 친우도, 고향도, 고요하고 포근한 밤의 잠자리도…
하물며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라고?
그런 간질간질 한 건…
언제쯤 빼앗겼는지 이젠 기억도 나질 않아.
…내가 마음을 바꿀 방법은 없는 거야?
크리스텔
후후…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내가 먼저 찾아냈겠지.
그대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네. 내가 복수만을 바라고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텨왔는지.
나의 오른쪽 눈에 깃든 이 저주받은 힘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
죽음으로의 도피조차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한,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집념을.
그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이해를 바라지도 않지. 그저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갈 뿐.
복수를 가로막는 자가 누구든, 내가 복수를 위해 어떤 짓을 저질러야 하든.
이미… 이미 그렇게 살아왔네. 죄 없는 자를 짓밟고, 이용하고, 희생시키면서.
그 모든 악업들은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서 행해졌어.
오늘 이 기회를 놓친다면, 나는 또다시 매일 밤 내가 파멸하던 날의 환상을 보겠지.
…그건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나를 막는다면 그대도 짓밟겠네.
…쏠 테면 쏴.
크리스텔
하하…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만…
나를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단장의 큰 실책이라네.
이건, 그대를 그저 위협하고 겁주어 물리려는 하는 것이 아니야.
크리스텔의 손가락이, 차가운 방아쇠 위에 얹혀졌다.
크리스텔
나는, 에데를 죽이고 목표를 쟁취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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