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2
협조 요청

현재, 나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루나
으아아아앙-!
…
루나
나 한 발짝도 못 움직여! 진짜 안 움직인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루나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놔…!
루나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눈 딱 감고 도와주면 되잖아 단장~!
응? 도와주라. 응? 응?
스마일
루나라는 사람의 존엄성은 이것으로 또 한 번 바닥을 갱신.
놀라운 속도로 떨어지는 루나의 인격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냄.
루나
시끄러워! 그럼 나더러 어딘가의 탄광에 처박혀서 일을 하란 말이야?
스마일
누구도 루나에게 사채까지 빌려 가면서 카지노에서 탕진을 하라고 협박하지 않았음.
아세라
…더군다나 공허 평가전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말이지.
너, 서부로 이동할 여행 경비까지 몽땅 가불받아서 날려버렸다며?
루나
따기만 했으면 우리 모두 일등석을 타고 갈 수 있었다구!
이게 어디 나만 좋다고 한 일인 줄 알아?
아세라
단장, 안 되겠어. 이번에야말로 루나의 끔찍한 버릇을 고쳐놓을 기회야.
이참에 그냥 탄광에 보내서 스스로의 힘으로 갚게 하자구.
루나
매정해! 아세라! 이렇게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단원이 검댕을 잔뜩 뒤집어쓰게 내버려두려고?
아세라
안돼. 안 바꿔줘. 돌아가.
루나
흐이이잇…!
허블이라는 녀석이 그랬단 말이야.
단장이 한 번만 도와주면 깔끔하게 빚을 없애주겠다고! 그러니 설득해달라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보이저 구원단 전체의 손해 아니겠어?
하아…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도와달라던데?
루나
그건…
나도 몰라!
그런데 그 녀석이 이렇게 말했던 건 기억나.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단장뿐이다.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 단장밖에 없대!
딱히 준비물 같은 것도 필요 없다고 그랬어!
딱! 몸만 오면 된다고 했어!
간단 알바! 고수입 보장! 너만 오면 고!
기각…!!!
루나
으힉?! 아니, 왜!!!
수상하기 짝이 없잖아…!!!
그딴 일거리, 할까 보냐!
허블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뭔가, 전달에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허블
이래서야… 루나 님께 부탁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후회가 듭니다만…
루나
우왓?!
허블…?
아세라
뭐, 뭐야?! 기계가 말을 하는데?
스마일
…기계에 인격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러 학자들의 궁금증.
분해 해보고 싶은 욕구를 힘껏 제어 중…
허블
…죄송하지만 제 본체를 만지작거리는 건 그만둬주십시오.
마침 직접 나타나셨겠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허블
오해하지는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루나 님의 어려움을 빌미로 단장님을 협박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으니.
다만, 단장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한 점의 거짓도 없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과정에서… 단장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소 자극적인 조건을 걸었을 뿐이죠.
비열하다 느끼셨다면 저를 욕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이야기 정도라면 들어볼게.
허블
좋습니다. 밖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니, 안쪽으로 안내하죠.

허블
이곳은 엿듣는 이도, 도청장치도 없는 vip룸입니다. 어떤 비밀이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죠.
어떤 의뢰길래 이렇게 조심하는 거야?
허블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건은…
집행자와 관련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들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공허의 힘을 받아들여 그 권속이 된 자들.
단장님이라면 그들과 만나본 적도 있으실 테니 말입니다.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허블
후후. 놀라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제 정보력을 얕보고 계셨나 보군요.
자, 그럼 각설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단장님께서는-
크리스텔
집행자 모르세르의 추적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네. 그것이 의뢰의 내용일세.
우-후후후.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군, 허블이여.
누구…?
허블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이 이번 의뢰의 진짜 의뢰인이십니다.
크리스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렐 해운상회의 크리스텔이라하네. 그리고 이쪽은…
에데
에데야.
크리스텔
에데여, 이럴 땐 조금 부연 설명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겠나?
에데
…하아. 일하는데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해?
모렐 해운상회에서 부대표를 맡고 있어. 이제 됐지?
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크리스텔
질문이라면 환영이라네. 얼마든지 물어보시게.
이 모르세르라는 집행자를…
너희가 쫓는 이유가 있어?
길레의 예를 떠올려보면 집행자라는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라비스타를 파괴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티리아라는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도 모나스티르에 애정을 갖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을 것.
그렇다면 그런 위험한 존재를 일개 상회가 추적한다는 게 쉽사리 이해가 가진 않았다.
폴라리스나 알리시아라면 모를까.
크리스텔
우후후후! 곧바로 핵심부터 물어오는 건가?
좋아 좋아. 무릇 동업자에게 비밀을 남겨둬서야 일이 진행되지 않는 법이지.
그 질문에는… 이 한마디로 답을 갈음할 수 있겠군.
복수일세.
복수…?
크리스텔
그래. 복수 말이야.
나의…
아니,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원수에 대한 피의 복수.
에데
모르세르의 이명은 기만의 집행자.
사람들 속이고, 제멋대로 조종하는 것에 유열을 느끼는 미치광이지.
까마득한 세월 동안 셀 수도 없이 신분과 얼굴을 갈아치워 가며 사람들을 속이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어 왔어.
크리스텔
단장이여. 그놈을 잡아 죽이는 것만이 우리의 염원일세.
아니, 오직 그것만을 보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리고 마침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에데
그 과정에서 조금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거고.
그런데 왜 하필 나야?
크리스텔
모르세르의 첩자는 어디에든 있거든. 그게 영겁의 세월 동안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비법이지.
그러니 우리의 조력자는 그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필요하지 않겠나?
에데
라비스타의 유지를 바라는 폴라리스, 제1 관측사 알리시아와 집행자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
넌 그런 알리시아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단장이잖아.
그만큼 확실한 신원 보증이 또 있기는 어렵지.
그렇다면 보이저 구원단은 어때?
모두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야.
크리스텔
그 의견은 기각하지.
어째서…?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크리스텔
단장이여. 그대는… 자신들이 얼마나 주목받는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것 같군.
생각해 보게. 그대의 구원단은 이루 말할 것 없이 이례적인 존재일세.
알리시아의 선택을 받아 임명된 수수께끼의 단장.
개인이 아닌 단체로 여정에 참여하게 된 신생 구원단.
거기에 그 이름도 보이저 구원단이라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지.
에데
그런 구원단이 단체로 어디론가 이동했다.
하아. 그걸 놈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바보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인원은 최소화하는 게 좋아. 애초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이쯤이면 납득했지?
선택지가 나 이외에는 없다…
…라는 거지?
크리스텔
그렇다네.
아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대가 거절한다면 우리의 복수 계획이 조금 어그러지기야 하겠지만…
여정의 단장인 그대를 우리가 강제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나?
이 제안은 그저, 그대의 의중을 묻는 것일 뿐.
암약하는 집행자를 잡기 위해…라.

티리아
그 재수 없는 전 직장동료가… 얼마 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해줬어.
알데바란님이 다시 돌아오실 거라고.
난 지금까지 모나스티르에서 얌전히 잘 살고 있었다고.
옛날에 몇 번… 집행자의 의무라는 걸 시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일이 썩 잘 풀리지는 않았고 말이지.

집행자라는 건,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티리아
…그런 걸 보통 본인한테 묻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뭐야, 진지하다고?
하아…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모르겠는데, 대충 말하자면-
공허의 별의 힘과 의지를 받아들인 존재.
이 정도로 말할 수 있겠네.
근데 이런 건 왜 묻는 거야? 쓸데없이.
너, 설마…
…하, 내가 혹시나 해서 친절하게 충고 하나 해줄게.
걔네들이랑은 되도록 안 엮이는 게 좋을 거야.
이번에 봤겠지만, 거긴 길레 같은 년들투성이라고.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흐음. 뭐, 너 하는 꼴을 보면 이런 조언 귓등으로 들을 것 같긴 하지만.
무슨 말이냐고?
글쎄… 태생적이라고 해야 할지,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지…
결국엔, 더럽게 엮일 것 같다는 얘기야.
어때? 답변이 됐니?

…결국 맞서게 될 상대라면, 조력자가 나타났을 때 뭐라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도와줄게.
크리스텔
우-후후후! 그 대답으로 우리의 의뢰를 받아들인다고 보면 되는 건가?
호탕하군. 마음에 들어. 용모 출중에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파렌의 사교장에 얼굴을 비췄다면 필시 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훔쳐갔겠어.
이번 의뢰가 무사히 끝난다면 부디 파렌에 한번 방문해 보는 건 어떤가?
그대 같은 남자라면 아름다운 여인들을 모아 하렘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정인이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게나.
파렌의 사교장에서는 능력만 있다면 하룻밤의 낭만 정도는 용납되는 분위기거든.
어, 어어…?
에데
이봐. 쓸데없는 잡담은 그쯤 해두지? 크리스텔.
저 녀석, 불편해하고 있잖아.
크리스텔
으음…? 그런가? 아쉽군.
에데
당연하지. 그럼 여정의 단장이라는 사람이 너 같은 난봉꾼일 리 없잖아.
…
언젠가 꼭, 시간이 남는다면 파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 하렘이라는 얄팍한 단어에 유혹당한 것은 아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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