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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8

그 달빛에 진실은 숨을 고르고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지만, 평범한 철창이 아닌지 허무하게 튕겨 나고 말았다.

나:

아야야…

크리스텔

단장이여, 공연히 힘 빼지 말게.

철창을 맨손으로 박살 낼 수 있을 정도의 완력이 있었다면 근위대와 맞서 싸우는 편이 나았겠지.

나:

그건 그렇지만…!

크리스텔

후후… 마음이 급해졌나? 감옥에 갇혀보는 건 처음인가 보군.

경험이 풍부한 이 크리스텔 드 몬투아가 좋은 팁을 주지.

지하 감옥이라는 건 으레 춥고 축축하기 때문에 눕기 전에 이렇게 천을 깔아주는 게 좋네.

그렇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쉽거든.

나:

…보통 없거든 그런 경험?

나:

뭘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어…

크리스텔

우-후후후! 그것도 그런가?

나:

크리스텔은 왜 그렇게 태평해?

크리스텔

태평한 게 아니라,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거라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에데에 대해서.

시종장

왕녀님! 아아! 왕녀님!

에데

아… 아아… 아아아…

시종장

왕녀님! 무사하십니까?

갑자기 방에서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는데, 여기 계셨습니까?

나:

…분명히.

나:

에데를 왕녀라고 불렀지?

크리스텔

그래. 아무래도 에데의 정체는 고대 왕국의 왕녀였던 모양이야.

거리에서 아무도 에데를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도 그것이겠지.

…왕녀는, 이미 오래전 괴질에 걸려 왕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왕궁을 나오기는커녕, 오랜 기간 동안 방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궁의 근위 기사만이 흐릿하게나마 에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지지.

그리고 내 추측이 맞다면…

어린 소녀의 목소리

아하핫! 이것 봐! 꽃이 활짝 피었어!

여기! 여기 내가 심었던 꽃도 있어!

와아-! 아바마마랑 어마마마한테도 보여드릴래!

크리스텔

어쩌면… 이 공간 자체가, 에데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나:

무슨 소리야?

크리스텔

이 세계가 에데의 기억에 기반하고 있단 가능성을 제시하는 걸세.

허나, 만약 그 가능성이 진실이라면-

에데

…

나:

…이건.

크리스텔

아무것도… 없군.

…어째서지? 모르세르는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지?

그 녀석이 아니라면…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힘의 근원은…

근위기사

죄인 놈들 주제에 시끄럽다! 조용히 있지 못해?

크리스텔

이보게. 물어볼 게 있는데.

근위기사

뭐? 날 뭘로 보는 거냐? 죄인들과 노닥거릴 정도로 물러 보이는-

크리스텔

간단한 질문이니 너무 경계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딱히 왕국의 비밀을 캐내려는 것도 아니고.

성실하게 대답만 해준다면, 이걸 주지.

근위기사

이게… 뭐지?

크리스텔

회중시계 라는 것일세.

시간을 알려주는 기물이지. 황금으로 만들었으니 쓰임새를 몰라도 값은 제법 나갈 거야.

근위기사

…당신들, 정말 그 노아…라는 신비한 나라에서 온 건가?

완전히 사기꾼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크리스텔

그런 셈이지. 그럼 제안에 응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네.

근위기사

끄응. 미리 말하지만, 알려줄 수 없는 내용은 대답할 수 없어. 알아두라고.

크리스텔

상관없어. 그럼 제일 먼저…

왕녀의 병세에 대해 듣고 싶은데.

근위기사

…왕녀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왕실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

아쉽지만 첫 번째 질문부터 답을 해줄 수 없겠군.

크리스텔

쩨쩨하긴. 어차피 왕녀납치범이 살아서 궁을 나갈 수나 있을 리도 없는데.

근위기사

그건… 또 그렇지만…?

크리스텔

걱정은 덜어두게. 주관식이 아니라 OX 퀴즈 같은 거니까.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 왕녀는-

어느 날 갑자기 열병에 시달렸겠지. 각종 약재를 써도 병세는 가라앉지 않았을 테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환상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이상할 정도로 욕구에 충실해졌으며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경우도 있었겠지.

정체 모를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기도 했을 거고.

근위기사

…?! 그걸 어떻게-

크리스텔

사방을 수소문해 봐도 이와 비슷한 역병은 기록된 바 없었다. 치료법도 역시 불명.

그리고 마침 우연히 지나가던 현자가 이를 도왔다. 맞지?

근위기사

…뭔가 알고 있나 보군.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크리스텔

간단하네. 내가 겪었던 일들을 나열했을 뿐이니.

나:

어…?

크리스텔

다음 질문이네.

우리는 현자의 방안을 살폈지만, 그 안에 현자는 없더군.

현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근위기사

그건… 뭐, 언젠간 알려질 일이니 상관없나.

현자님은 이미 계시지 않네.

크리스텔

그게 무슨 의미지…?

근위기사

왕녀님을 치료하던 도중, 돌연 모습을 감추셨거든.

남겨져 있던 흔적을 보아…

왕녀님의 병세에 현자님도 통째로 집어삼켜졌을 거라 예상하고 있어.

크리스텔

…역시 그런가.

……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지.

괜찮다면 지금 창밖을 봐줄 수 있겠나?

간수 역의 기사는 한쪽 벽 높이 나 있는 작은 창문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근위기사

어…? 어라…?

크리스텔

지금, 달은 어떤 색이지?

근위기사

붉은… 피처럼 새빨간 색이야… 이게 무슨 일이지?!

크리스텔

…하. 하하… 붉은 달이라. 그래.

나:

붉은 달이라니, 어째서?

크리스텔

…설명해 주지. 하늘에 붉은 달이 떴다는 것은-

근위기사

긴급 상황이라고?! 치잇…! 너희는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크리스텔

…멸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뜻이라네. 단장이여.

나:

멸망… 이라고?

크리스텔

단장이여.

나는 에데를 처음 만났을 당시, 폐허가 된 유적을 샅샅이 조사한 적이 있다네.

마치 존재가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린, 베일에 싸인 고대 왕국.

그 잔해에서 그들이 어떤 멸망을 맞이했는지 조사하려던 셈이었지.

그러면, 왕국의 멸망을 주도한 모르세르에 대해 더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는 도움이 될만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어.

그저 한 가지 이상한 점만을 발견했을 뿐이라네.

나:

그게 뭔데?

크리스텔

왕성에 어떠한 반항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정황상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너무나 이상한 일이지.

그렇지 않나?

나:

으음… 그러게?

크리스텔

그리고… 단장이여, 우리는 얼마 전 왕성을 떠나는 대규모의 기사단을 보았지.

나:

…어라?

크리스텔

어떤 수를 썼는지 몰라도 놈은 이때를 노린 거야.

나:

그치만, 현자는 사라졌다고 했잖아?

크리스텔

그야… 놈이 당초 목적했던 바를 전부 이루었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죽은 게 아니다. 떠난 거지.

놈의 유흥이 끝났다면, 남은 것은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

어쩌면,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군.

나:

그게 사실이라면…

나:

나가서 에데를 되찾아야 해!

크리스텔

…단장이여. 그 전에 한 가지 더 말해줄 것이 있네.

내 예상이 맞다면 에데는…

나는 에데를…

……

나:

왜 그래?

크리스텔

…아니, 아직은 확실하지 않으니 말을 삼가는 게 좋겠군. 그것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크리스텔은 오른쪽 눈을 가린 머리칼을 들어 올린 허공을 응시했다.

크리스텔

이 세계를 유지하는 핵이 아직 왕궁 어딘가에 있음이 느껴져.

그걸 파괴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빠르게 에데를 확보한 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지.

…우후후. 잔해에 깔려 죽기 전에 감옥에서 나가는 게 먼저겠지만.

나:

남 일이 아니거든…?!

다행히, 방금 지진으로 인해 철창이 고정되어 있던 부분이 조금 느슨해진 것이 보였다.

나는 외투로 주먹을 둘둘 감싼 뒤 덜렁거리는 철창을 향해 회심의 주먹을…

…날리기도 전에 철창이 통째로 박살 나 날아갔다.

나:

…?!

사람 키만한 거대한 대검이 뒤편의 돌벽을 뚫고 날아와 철창을 날려버린 것이다.

크리스텔

저건…?!

낯익은 석상이 구멍이 뚫린 벽을 마저 박살 내고 감옥으로 들어섰다.

녀석은 빤히 우리를 쳐다보더니 이내 발걸음을 돌려 벽에 박힌 대검을 뽑아 들었다.

크리스텔

…어쩐지 적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군.

밖에서부터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나:

뭐가 뭔지는 몰라도…

나:

따라오라는 눈치인데?

크리스텔

그 정도의 지성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우리도 에데를 찾으러 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

저 석상을 앞세우면 근위대도 함부로 우릴 막아서지는 못할 테니, 방패로 쓰면 되겠어.

나:

서두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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