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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6

거상의 임기응변

에데

정말 이게 통할까…?

크리스텔

이런이런… 아직도 나에 대한 믿음이 그리 부족해서야.

조사 결과, 이 왕국에는 동대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차림새는 어엿한 이방인이라 해도 무방하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위장이라고.

크리스텔의 계획인즉, 동대륙에서 온 사절단으로 위장해 왕궁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소하고 앙증맞은 오류가 있었으니…

나:

동대륙에서 온 사절이…

나:

빈손으로 올까…?

크리스텔

…

에데

대답 좀 해보시지?

크리스텔

어, 어쩔 수 없었어!

수중에 있던 값나가는 물건을 전부 팔아도 겨우 마차 한 대 값을 치르고 조금 남는 수준이었다고.

게다가, 당장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은 누가 봐도 동대륙의 물건이 아니지 않나.

이것저것 사들여 모양새만 갖춰봐야 오히려 오해만 가중시킬 뿐이야.

에데

뭐어… 아예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네.

크리스텔

그대들은 너무 걱정이 많대도 그러네.

잘 봐두게. 이 크리스텔이 난관을 돌파하는 모습을.

경비병

멈춰라!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크리스텔

아아- 이 몸의 행차를 기어이 막아서는가, 경비병이여!

경비병

…어? 누구… 십니까?

크리스텔

이런이런, 아직 연락을 받지 못했나 보군.

우-후후후!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동쪽 멀리 바다 건너 동대륙!

하늘의 별을 보며 천지를 굽어살피는 알리시아 황제 폐하가 다스리시는!

나:

…예?

에데

…적당히 맞춰줘. 그런 설정으로 가는 모양이니까.

크리스텔

대제국 NOA에서 온 사절단이다!

나:

그, 그렇다!

크리스텔

귀국의 왕녀께서 앓고 있는 괴질의 치료를 위한 약재를 가져왔지.

경비병

도, 동대륙의 사절단!

…치고는 규모가 굉장히 소박-

크리스텔

어허-! 감히 동대륙을 다스리시는 황제 폐하의 사절단을 능멸하려는겐가-!

경비병

그, 그건 아닙니다만…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일단 그런 큰 문제는 제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잠깐만…

동대륙에는 아직 왕녀님의 사정이 닿지 못했을 텐데?

동대륙으로 떠나는 기사님들은 겨우 지난주에 왕성을 떠났으니까…

크리스텔

…?!

나:

날카로운 지적인데?

에데

…그 정도는 미리 대비해 둔 거 맞지?

크리스텔

생각해 보니 그 점을 생각 못 했군. 내 실책이야.

에데

하아…

나:

이제 어쩔 셈이야?

크리스텔

후후… 사업을 하는 도중에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기는 건 일상다반사.

이 정도의 돌발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지 못해서야 사업가라 할 수 없어.

내 친히 보여주겠네.

모렐 해운상회를 파렌 최고의 상회로 올려놓은 수완을 말이야.

나:

오오…!

크리스텔

아아, 이런이런.

그대는 아직 귀국의 왕궁에 거하는 현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보군.

그분께서는 이미 아국에도 방문하신 적이 있지.

그리고, 귀국의 왕녀께서 괴질에 걸리기도 한참 전에 예언을 하셨다네.

성스러운 산의 약재를 구해 귀국에 사절단을 보낼 것을 말이야!

경비병

아닛…?! 설마 거기까지 내다보고 계셨다니…!

나:

속는 거 쉬워…!

크리스텔

후후… 어서 그대는 귀국의 왕께 사절단이 당도했음을 고하고 성문을 열라!

경비병

하, 하지만… 귀하께서 그 사절단이라는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동대륙에서 오셨다는 증거 정도는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나:

…아닌가?

에데

제법 깐깐한걸. 이제 어떡할래?

크리스텔

윽… 그건… 증거로 보여줄 만한 게…

음…?

어쩔 수 없군. 자, 이걸 받게.

경비병

이건… 뭡니까?

크리스텔이 경비병에게 건넨 것은, 가방에 들어있던 탄산음료 캔이었다.

크리스텔

동대륙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생명의 비약이랄까.

경비병

그, 그렇게 귀한 걸 이렇게 막 주셔도 괜찮습니까?

크리스텔

후우… 헤아릴 수 없이 값진 물건이네만, 그대를 보면… 아버님이 떠올라서 말이야.

이 땡볕 아래에서도 그대는 조국에 대한 충정만을 바라보며 이리 충실히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아버님도… 조국을 위해 싸우는 기사셨다네.

그러니 그 노고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는 게지.

경비병

오오…

나:

거짓말 같은데…

에데

거짓말이니까.

나:

아.

크리스텔

자, 상단의 금속 조각을 힘을 주어 들어 올려보게. 뚜껑이 열릴 거야.

경비병

이렇게… 말입니까?

크리스텔

단숨에 들이키게.

경비병

큭… 헉… 흐윽…

이것이… 생명의 비약…!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것이, 이런 건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크리스텔

자아… 경비병이여, 잘 듣게.

그 생명의 비약이 바로 현자께서 필요로 하신 약재라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약재는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약효가 날아가 버리고 말아.

경비병

약효가…!

크리스텔

더운 곳에 놔두면 김이 빠져버리거든.

그러니, 서둘러야하지 않겠나? 시원한 왕궁 안으로 들여놓는 것이 좋을 테니까.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닐세. 어차피 그대는 말단의 말단.

나는 그저…

그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해 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네.

경비병

어…? 이, 이건 금화…?

크리스텔

아아, 놀라지 말게. 이건 그냥 작은 성의 표시일 뿐이니까.

그대의 충심에는 감탄하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어렵지.

이해하네 이해해. 다 세상살이가 그런 것 아니겠나?

경비병

어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크리스텔

어어? 넣어두게. 그대가 거절하면 내가 천박한 사람이 되고 말잖나?

경비병

…그렇다면, 일단 성문을 열어드릴 테니 대기 장소에서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크리스텔

물론이지 물론이야! 우-후후후!

에데

우여곡절이 조금 있었지만, 일단 들어오는 데에는 성공인가?

모렐 해운상회를 파렌 최고의 상회로 올려놓은 수완…

이런 거였나…!

나:

어른들의 어두운 진실…

에데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 상회는 어디까지나-

크리스텔

내가 뭐랬나? 잘 풀릴 거랬지?

자고로 황금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통하는 법이거든.

우-후후후!

나:

적극적인 뇌물 공세가 비결…

에데

그런 거 안 했어…!

너도 헛소리는 그쯤 해 둬. 단장이 오해하잖아.

크리스텔

후후… 뭐, 딱히 오해라고 부를만한 건 없을지도 모르지.

복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설령 누군가의 목숨과 맞바꾸더라도. 그게 내 지론이니까.

에데

…하아.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도박이었어. 들켰으면 어쩌려고?

크리스텔

매정하긴. 에데여, 그대는 항상 칭찬이 박하다!

에데

시끄러워. 애도 아니고 무슨 칭찬이야.

크리스텔

우우… 언제쯤 그대는 따뜻한 말로 내 공을 치하하며 꼬옥 안겨줄까…?

에데

그런 일 없으니까 꿈 깨시지…!

크리스텔

아무도 없나…?

에데

…괜찮으니까 얼른 나와.

아무도 없어. 복도 끝까지 확인했다고.

나:

들키면 큰일 나겠지…?

에데

아마 죽을걸?

크리스텔

왕궁에 숨어든 도둑이라… 목 매달리기 딱 좋은 죄목이군.

우-후후후! 겁낼 필요 없네. 안 들키면 되지 않나 안 들키면.

웃는 얼굴로 살벌한 말을 남긴 크리스텔은 좁은 복도 끝에 있는 화려한 문 앞에 섰다.

에데

이곳이 바로…

나:

현자의 방이라는 거지?

크리스텔

그래. 바로 이 방 너머에서 공허의 힘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어.

아마…

에데

모르세르가 이 안에 있다는 거겠지.

크리스텔

각오는 되어있나, 에데여?

에데

각오는 늘 되어있었어.

…내가 눈을 뜬 그 순간부터 계속.

크리스텔

그럼… 문을 열 테니 그대는 놈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해 주게.

에데

…맡겨둬. 조금이라도 발버둥 치면 손발을 꿰뚫어 벽에 박아버릴 테니까.

크리스텔

우후후… 훌륭한 계획이야. 그럼 맡겨두겠네.

단장. 그대는 놈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아주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나:

얼마든지.

크리스텔

그럼… 가볼까. 우리가 맹세한 피의 복수를 완결 지으러.

에데

…응.

커다란 문이 열리고 비밀에 감춰져 있던 현자의 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에데

…

나:

…이건.

크리스텔

아무것도… 없군.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가구는커녕 벽면 사이의 경계면 마저 흐릿해져 입체감이 없는, 사방이 그저 검은 단면과도 같은 공간.

공간 자체가 현실에서 도려내진 듯한 그 어둠에서는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흡인력마저 느껴졌다.

크리스텔

모종의 결계도 아니고 마력이나 공허의 힘이 남긴 흔적도 없어.

이건, 단순히 방을 비운 거라기 보단…

공간을 지웠다에 가까운 개념일 것 같군.

에데

도망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조치를 취해둔 건가.

우리, 한발 늦었나 보네.

크리스텔

흐음… 이렇게 되면 당초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는데.

일단, 되돌아가서 다시 상황을 정리하는 게 좋겠어.

에데

알았…어. 읏…

크리스텔

에데여, 괜찮나? 갑자기 쓰러지다니, 몸이 안 좋아졌다든가?

에데

…별 건 아니…야.

그냥… 잠깐, 속이 안 좋아진 것뿐이니까.

크리스텔

…아무래도 안 되겠군. 업히게.

에데

뭣… 돼, 됐어. 그냥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으니까…!

크리스텔

잔말 말고 업히게. 그렇게 파래진 안색으로 어딜 걷겠다는 거야.

에데

그러니까… 괜찮다니까…!

???

이봐.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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