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12
변치 않는 것들에 대하여

에데
크흐읏-!
크리스텔
에데여! 무사한가-!
에데
칫… 나보다 네 걱정이나 해…! 방금 죽을 뻔했잖아!
크리스텔
우후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네.
근위대장
…왕녀님을… 지킨다…
크리스텔
그 대단한 왕녀님이 여기 계시지 않나! 이 미련한 깡통 같으니!
치잇… 말이라도 통했다면 뭐든 해봤을 것을…
에데
소용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녀석에게 당한 세뇌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거.
성이 무너지기 전까지…
쓰러뜨릴 수 있을까?
에데
힘들겠지. 방금 전의 싸움, 전력을 다한 거였어.
하지만 이제 겨우 갑주의 외피 한 꺼풀을 벗겼을 뿐이야.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승산은 없다고 봐도 되겠지.
크리스텔
어떤 공격도 제대로 된 유효타로 들어가질 않아. 단지 충격으로 밀어내는 게 고작.
…괴물이 따로 없군.
면목 없군 단장이여.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리게 해버렸어.
그대를 이곳에 끌고 온 것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도 모두 나의 책임.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볼 테니 그대는 빠져나갈 길을 찾아.
에데여, 그대도 단장과 함께 움직이게.
에데
…흥. 헛소리.
혼자 남으면 몇 합도 버티지 못하고 저 대검에 두 동강이 나버릴걸?
크리스텔
후후… 에데여, 잊었는가?
이 크리스텔 드 몬투아는 복수를 완성할 때까지 결코 죽지 않네.
반쯤은 공허에 물든 이 몸뚱이는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 것!
겨우 돌무더기에 깔리는 정도로는 문제없지!
에데
…폼 잡기는.
크리스텔
뭣…
에데
네 몸, 떨리고 있는 거 알고 있지?
크리스텔
자, 잘못 본거야! 겁 같은 건 하나도 나지 않아!
에데
그런 거, 너답지 않으니까 하던 대로 해.
갑자기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차가운 이성 속에 뜨거운 복수심을 감추라며?
애초에, 네가 희생한다고 해서 무사히 나갈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
크리스텔
그, 그렇지만…!
에데
흥. 됐어. 그냥 내가 알아서 하겠어.
나한테는 방법이 하나 남았으니까.
방법…?
에데
다들 지금쯤이면 눈치챘겠지만.
여긴 나의 기억을 기반으로 억지로 빚어 올려진 세계.
그렇다면 반대로 이 세계가 설계도를 잃어버린 순간 모든 게 일순간에 소멸하겠지.
없던 것이 된 공간에는 무너져 내릴 천장도, 꺼질 바닥도 없어.
눈 떠보면 단지 폐허가 된 유적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일 거야.
…?!
잠깐 그 말은-
크리스텔
…!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데여, 아직 나에게도 비장의 한 수가 남았네.
이 눈의 힘을 전부 개방하면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
큿, 크으윽!
앞머리를 걷어 올리려던 크리스텔의 신형이 신음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에데
…억지 부리지 마. 이미 공허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다 썼잖아.
이 이상 무리했다가는 넌 인간으로 남을 수 없어.
크리스텔. 인정해. 이번은 우리의 패배로 끝난 거야.
우리가 모르세르의 함정을 파훼한 게 아니었어.
그냥 처음부터 나가는 길 같은 건 하나밖에 없었던 거야.
나의 죽음 말이야.
크리스텔
읏… 안… 돼…!
이런… 식으로는…!
에데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번엔 아까랑은 다르니까.
더 이상 복수를 할 의미가 없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복수를 위한 나의 마지막 의지지.
크리스텔.
나의 보호자이자 동반자, 동료 그리고…
친구.
나의 복수는 여기서 끝이 나버렸지만, 너는 계속 나아가 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별거 아니야. 단순히-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불타버린 왕국의 재가 이제 기나긴 불꽃을 꺼트리고 먼지로 돌아갈 때인 거지.
…그러니 살아. 내 몫까지 살아서 모르세르에게 복수해 주었으면 해.
그게 나의 바람이야.
크리스텔
……
에데
그리고 단장.
나는 아직…!
에데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이게 가장 나은 선택지라는 걸 말이야.
그렇지만…
덕분에, 후회하며 죽지는 않을 수 있겠네.
…다른 의미를 찾으면 그만이라고 했지?
어쩌면, 복수가 끝난 다음에 널 만났다면.
분명, 그런 삶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러니까…
…고마웠어.
작별 인사는 이제 그만.
그 앞으로는 더 이상 오지 마.
전부 거짓된 환상일 뿐이지만, 이 왕국은 나의 고향.
얽혀버린 매듭을 푸는 건 나여야 하니까.
남아 있던 창을 모두 바닥에 꽂아 벽을 세운 에데는 뒤돌아보지 않고 기사에게 나아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쉽사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지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째서지.
멋대로 구하겠다느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느니 그럴듯한 말은 잔뜩 해놓은 주제에 어째서 그녀를 막을 수 없는 거지.
…그건 아마도.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닌, 모든 걸 알면서도 고심 끝에 내린 그녀의 선택을-
누구의 간섭도 없이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결론을 무심히 짓밟아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에데
너의 왕녀가 여기 왔어.
근위대장
가짜… 그대는… 왕녀님이… 아니다.
빛나는 은빛 갑주의 기사는 고고하게 선 에데를 향해 끔찍한 포효를 내지른다.
눈 깜짝할 사이 기사의 대검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크리스텔
큿… 으으읏…! 에… 데…!!!
몸을 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흐느적거리던 크리스텔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붉은 시선이 기사를 향해 날아든다.
기사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에데
그만해!
그러다 죽는다고!
크리스텔
…하지만…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고…
뒤늦게 후회하는 바보 같은 짓은 두번 다시는…!
에데
…바보.
희미하게 웃음짓는 에데의 뒤로, 대검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인다.
…엇?!
크리스텔
저건…!
그 석상…?

석상의 대검이 은빛 갑주를 꿰뚫자 근위대장은 고통스러운 단말마를 내뱉으며 쓰러졌다.
크리스텔
우리… 편인 건가…?
적을 쓰러뜨린 건 좋은 일이지만
…조금 늦어버린 걸지도.
간신히 버티던 왕궁의 벽이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석상의 거대한 팔이 에데를 끌어안듯 낚아챈다.
석상은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몸을 던져왔다.
그 단단하고 둔중한 거구가 세 사람을 감싸안은 순간-
크리스텔
윽…!
쏟아져 내린 잔해가 화원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빛도, 소리도, 형체도 전부 무너져 내린 텅 빈 공백에 어둠이 가라앉는다.
에데
……
내가…
…전부 내가…
…아아아…
근위대장
…왕녀님. 근위대장 페르세스, 왕성의 소식을 듣고 급히 복귀했습니다!
속히 몸을 피하시어-
에데
…내 잘못이야…
근위대장
…
에데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나 같은 건…
근위대장
…왕녀님, 신은 미련하여 이 비극과 관련된 모든 진실을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신이 하늘에 맹세한 한가지만큼은 기억합니다.
페르세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신 페르세스. 왕녀님을 지키겠다 맹세했나이다.
다른 모든 기사들도, 신과 뜻을 같이하겠으니-
모든 것을, 그 존재마저 제물로 하는 한이 있더라도 왕녀님에 대한 충성은…
페르세스
…영원히.
대지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높이 솟은 성벽도, 불타던 왕궁도, 생명을 잃은 망자도.
모두.

석상
……
에데
…방금 그거, 나만 본 거 아니지?
나도 봤어.
에데
그게… 그게 전부 진짜라면…
크리스텔
…그런 건가.
그래서 유적이…
…에데여. 아무래도 저 석상이 바로-
상처투성이가 된 석상이 에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에데
…응.
나의… 근위대장.
석상은 제단에 꽂혀 있던 석판을 들어 올려 에데에게 건넨다.
크리스텔
그들은… 폭주하던 그대의 몸속 공허의 힘과 자신의 육체…
그리고 멸망해 버린 왕국의 존재 그 자체를 통째로 제물로 삼아 그대를 살린 거라네. 에데여.
에데
…미련해.
그래봐야 결국… 모르세르에게 이용당한 셈이 되어 버렸잖아.
…흥.
쓸쓸한 눈으로 석상을 바라보던 에데는 이내 석판을 받아 들었다.
에데
이건 일단 받아 가겠어.
…복수가 끝나는 날 다시 돌아올게.
석상은 묵묵히 제단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섰다.

크리스텔
…
에데
…
유적을 빠져나오는 내내,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어색한 기분이 들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때.
크리스텔
이 정도라면 만족했나?
음…?
크리스텔
결말 말이야.
그대가 말했었지, 다른 결말을 보고 싶었다고.
이 정도면, 그대가 보기에 나쁘지 않은 결말인가?
결말이라… 글쎄.
아직 결말은 보지 못한 것 같은데?
크리스텔
…그런가.
우-후후후! 그렇군. 아직 복수를 완결짓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이건 그저… 이 복수극의 전환일뿐인 셈인 거지.
에데
…응. 당해주는 건 이걸로 충분해. 이젠…
우리 쪽에서 사냥을 시작하자.
크리스텔
내 말이 바로 그것일세 에데여! 역시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에데 뿐이군!
강하네. 두 사람은.
크리스텔
으응?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에데, 하마터면 죽일 뻔했잖아?
서로 괜찮은 거야?
크리스텔
……
우-후후후! 단장이여. 그건 어디까지나 오해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뿐!
이 크리스텔 드 몬투아. 그대 덕에 깨달음을 얻은 이상, 그런 어리석은 일은 다시 없네!
에데와 나는 함께 복수를 맹세한 끈끈한 사이! 더는 무엇도 우리를 이간질할 수-
에데
…알았으니까 들러붙지 말고 좀 떨어져.
크리스텔
매, 매정하기는 에데여! 설마, 아까 나의 죄업을 마음에 담아두는 건가…
에데
…하아. 그럴 리가. 신경 안 써.
나였어도 분명 그렇게 했을 거고.
애초에 내가 그러길 바랐던 거니까. 다만…
…너. 아까는 은근슬쩍 넘어갔다만, 누가 네 거야?
크리스텔
엇…?
에데
아까 그랬잖아? 오롯이 나의 것이니 뭐니.
크리스텔
흐음…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늘 말했지만, 그대를 구했을 때 나는 뭐랄까…
비에 젖은 새끼 고양이를 줍는 심정으로…
에데
그 지긋지긋한 새끼 고양이 타령 좀 그만하랬지…?!
크리스텔
우후후후! 부끄러워하기는! 이리 와 안겨보게나! 나의 용서의 포옹을 받아주게!
에데
크읏…! 오, 오지마! 달라붙지 마!
크리스텔을 피해 쪼르르 달려온 에데가 내 등 뒤에 숨었다.
코트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힘들어?
에데
…긴장이 풀려서 다리에 살짝 힘이 없어졌을 뿐이야.
잠시 쉬면 금방 괜찮아지니까, 신경 쓸 필요-
다리 아팠구나?
목마 태워줄게.
에데
흐읏?! 하아…?! 이, 이거 놔!
크리스텔
호오… 대담하군 단장이여.
그럼 교대로 에데를 맡도록 하지.
에데
그, 그러니까 좀 떨어지래도…?!
손 치워…!
잔뜩 땀 흘려서 끈적끈적하니까 어깨에 손 올리지 말라고!
크리스텔
서로 진정한 동료로 거듭났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에데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게다가… 네 몸도 정상이 아닌 주제에 무슨 부축이야 부축은!
크리스텔
헛…! 내 몸을 걱정해 주는 건가? 에데여!
이 크리스텔 드 몬투아… 감동받아 눈물이 나려고 하네!
에데
그,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그냥… 괜히 나서다가 나까지 다칠까 봐 그런 거니까!
크리스텔
우-후후후! 에데여, 짜증을 내면서도 도망치지는 않는군…?
에데
…시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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