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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10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결말

크리스텔

단장이여.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를 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라네.

아마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할 테지.

모르세르에의 복수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대의 목숨.

둘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나는 거리낌 없이 복수를 택할 것이니.

그러니… 비켜주게. 필요하다면 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나:

네가 저울에 올려둬야 할 건 내가 아니야.

나:

에데지.

크리스텔

…

단장이여. 그렇다 해도 바뀔 것은 없어.

그런 감성적인 호소는 내게 도달하지 않아.

그대를 쏜 뒤, 에데마저 쏘아 죽이고 끝내 모르세르에 닿는 것을 택하겠지.

그 모든 일이 있은 뒤에도 내 눈가에 작은 눈물마저 맺히지 않을 것이고.

나:

그래. 그렇구나.

크리스텔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건가, 단장이여.

나:

물론.

크리스텔

…나로서는 그대를 이해할 수가 없군.

그대는… 어째서 이런 선택을 내린 거지?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득이 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그대는 우리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터.

에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까지 걸고 막아서는 건,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워.

나:

틀렸어.

크리스텔

으응?

나:

에데만을 구하려는 게 아니거든.

나:

구하려는 대상에는 너도 포함이야.

크리스텔

…그게 무슨 소리지?

총을 겨누고 있는 건 다른 이가 아닌 나인데…

그대가 총구를 가로막는 것이 나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나:

여기서 에데를 쏘면…

나:

네 복수는 영원히 완결될 수 없을 테니까.

크리스텔

…말도 안 되는 소리군.

나의 복수는 모르세르를 찾아 죽이는 것일세.

그리고 에데의 몸속에는 모르세르가 남긴 공허의 힘이 깃들어 있지.

오히려 에데를 죽여야만 나의 복수는 완결-

나:

그다음에는?

크리스텔

그다음…?

나:

에데를 죽이고 흔적을 찾는다.

나:

모르세르를 찾아 죽인다. 그다음은?

크리스텔

무슨 소리를 하나 했는데, 궤변이군.

그다음?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일이 그대의 말대로 된다면 그걸로 이미 나의 복수는 성공한 것이네.

모든 게 끝나면… 이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나:

아니. 그 뒤에는 네가 남아.

나: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네가.

크리스텔

나밖에 남지 않는다는 게 무엇이 문제지?

지금껏 그랬던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내게 남은 건 복수 단 하나이니.

나:

크리스텔은… 오만하네.

크리스텔

오만…? 감히 내게 그런 말을…!

나:

건방지고, 교만하고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어.

크리스텔

…후후. 단장이여. 막말로 나를 흔들어보려는 심산이라면 그만두게.

그런다고 해서 내가 마음을 돌릴거라 생각하는 건가?

나:

정말 너 혼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

크리스텔

…

크리스텔

…그래. 에데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

하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녀를 버리는 업보를 짊어지고 살아가겠네.

이 크리스텔, 피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내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상관없어.

…휴우.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그대에게는… 이 총구가 보이지 않는 건가?

설령 단장 그대의 물음이 모두 정당한 것이라 해도-

여전히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나를 막아서는 의도를 알 수 없는 게 사실이야.

그냥 모른척하면 되지 않나?

그러니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다.

그대는… 무얼 위해 이런 무모한 짓을 하고 있지?

나:

난…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게. 난 왜 그녀를 막아서는 걸까?

솔직히 말해, 두 사람과의 인연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그런 그들을 위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크리스텔

푸하하하핫-!

스스로조차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가, 단장이여.

고작 그런 얕은 동정으로 나의 복수를 막아서는 거라면…

크리스텔의 목소리에 눅진한 분노가 섞여 들었다.

크리스텔

그런 거라면…

네가 품은 그 알량한 위선 따위, 이 자리에서 손수 부숴주겠어.

크리스텔의 주위로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매섭게 요동친다.

바람에 흩날린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 틀어박힌다.

일순 시야가 흔들리더니, 사방이 붉게 물들어간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 온다.

나:

크읏…!

크리스텔

오만한 건 내가 아니라 너다. 단장.

…나와 에데를 모두 구하겠다고?

어리광도 그만하면 충분해!

하아? 모두를 구하고 싶어?

복수를 마친 이후의 나마저 구원하고 싶어?

웃기지도 않아.

넌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진짜 지옥이란 게 뭔지 말이야.

푸후후훗… 그래. 알 리가 없지.

눈을 떠도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꾼 적이 있어?

눈을 감아도 고요한 적막을 바랄 수 없는 나날은 살아본 적은?

이 눈은…

끊임없이 지옥을 내게 보여줘.

두 눈에 선명한 파멸을 두 손 놓고 지켜봐야만 하는 지옥을.

한순간의 실수가 망가뜨려 버린…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들에 참회조차 건네지 못하는 지옥을.

매일 밤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조차도!

나를 탓하는 비명과 철벅거리는 핏물소리가 맴돈단 말이야!

스토리 일러스트

크리스텔

너는… 몰라.

소중한 것들을 매 순간 다시 잃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 지옥 속에서 그놈의 구역질 나는 조소 앞에 무릎 꿇는 게 어떤 기분인지.

무엇이든 할 테니 이 비극을 멈춰달라 구차하게 빌어야 하는 치욕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날 몸을 뉘이면 다시 반복될 추악한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한히 반복되는 연옥 속에서 나는 빠져나올 수 없어.

그 굴레를 끊어내는 방법은 하나뿐…

모르세르의 죽음.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그녀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복수를 다짐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머릿속으로 이해할 뿐,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 감정에 닿을 수 없다.

그래도.

나:

이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복수를 위해 소중한 동료를 직접 죽여야만 한다는 결말은.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어진 결말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크리스텔

정말이지… 제멋대로군.

더 이상 네 그 같잖은 영웅놀이에 놀아나 줄 생각은 없다.

에데는 이곳에서 죽어야 해.

모르세르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어.

그래도 억지를 부릴 셈이라면… 힘으로라도 막아보지 그래.

크리스텔이 쏘아낸 총탄이 검을 쥔 손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총알이 낸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과 함께 스타피어서가 공중에 떠올랐다.

엄청난 충격이 오른손을 타고 어깨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크리스텔

체크메이트다. 단장.

이래도 그 의미 없는 어리광을 계속할 셈이냐!

나:

에데는 네 동료야.

나:

친구고, 가족이었잖아.

크리스텔

풉… 푸흣… 동료? 친구? 가족?

말했지만, 전부 가면이었어.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

네게도 그렇게 보였다니, 나의 기만은 성공적이었나 보네.

거짓말이다.

두 사람과 함께한 것은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

너도 알고 있어.

나:

네가 누구보다 에데를 아꼈다는 걸.

크리스텔

…제발 그만 입 좀 닥쳐!

그 모든 걸 안다는 듯이 내뱉은 따뜻한 말들…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네가… 뭘 아는데?

그렇게 혼자 고고하게 위에 서서 잘난 듯 건네는 동정 따위!

듣고 있자면 진절머리가 난단 말이야!

사람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

…이해 없이 내뱉은 가벼운 동정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라고.

나:

…

크리스텔

이 복수는… 우리가 바라왔던 결말이야.

그러니까… 반드시…

그래. 에데 스스로도 이런 결말을 바라고 있을 거야.

그렇지? 에데? 그렇다고 해… 어서!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너도 그걸 바란다고 말하란 말이야!

나:

어떻게 알아?

크리스텔

뭐…?

나:

넌 에데가 아니야. 너 또한 그녀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

나: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크리스텔

…!

크읏…! 흐으읏…!

스토리 일러스트

에데

…너.

무리했어. 눈의 힘을 너무 남발하면, 결국 그것에 잡아먹힐 거야.

크리스텔

흐으으읏…!

에데

또, 악몽을 꾸는구나.

눈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크리스텔에게, 에데가 비척비척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힘없이 늘어뜨린, 총을 쥔 손을 붙잡고 자신의 심장에 겨누었다.

에데

네 말대로야.

복수는 우리의 비원이었지.

이제 와서 나는… 그 의미를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그렇다면.

날 죽이고 네 복수를 완성시켜. 그래도 좋아.

크리스텔

큿… 에데…

나:

속이고 속이다가…

나:

끝내 너 자신마저 속일 셈이야?

크리스텔

어떤 관계라… 글쎄,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음, 에데의 보호자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옳을 것 같군.

말하자면, 엄마 같은 걸세.

크리스텔

자신을 도외시한 채 복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란, 외로운 거라네.

더군다나 자신을 잃어버린 삶은 더더욱 외롭고 고독하지.

정말, 과거를 엿보고 싶지 않나?

크리스텔

…아무래도 안 되겠군. 업히게.

에데

뭣… 돼, 됐어. 그냥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으니까…!

크리스텔

잔말 말고 업히게. 그렇게 파래진 안색으로 어딜 걷겠다는 거야.

스토리 일러스트

크리스텔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움켜쥐었던 권총이 철그럭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진다.

크리스텔

……

…그렇다면. 만에 하나 그 감정들이 진짜였다면.

스토리 일러스트

크리스텔

…그렇다면 난… 어떻게 했었어야…

그치만… 모르세르를… 에데를…

나는… 어느 쪽도…

나:

인간이란 건 원래 모순적인 거야.

나:

이기적이기도 하고.

그 자기 모순과 이기심은 인간을 실수로 이끈다.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한다.

하지만.

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지켜보고 싶지 않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망가진 결말은.

납득하고 싶지 않다.

크리스텔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난…

또 얼마나 기다려야 모르세르를 잡을 수 있을지…

나는 떨리는 크리스텔의 손을 천천히 붙잡았다.

나:

…내 약속은 아직 유효해.

나:

너흴 돕겠다고 했잖아.

크리스텔

……

…후…후후…후후후후…

후하하하하-!

그랬나… 그랬던 건가… 아아… 억지를 부리던 건 내 쪽이었나.

…단장이여.

그대는… 어리기만 한 게 아니라 제멋대로에…

…유치하고, 어리석고, 고집불통이야.

하지만, 그게 바로 그대의 힘인가 보군. 한번… 믿어보고 싶게 만들어.

나:

…생각을 바꿔서 다행이야.

크리스텔

후우… 그대 덕분에 분노에 과열되었던 머리가 식었다.

이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군.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결말이라.

확실히… 그렇겠어.

어째서… 나는 그대가 말해주기 전까지 이런 간단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거지?

크리스텔이 재빠르게 총을 들어 올렸다. 미처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나:

안 돼-!!!

한 발의 총성이 메아리치며 공간을 가득 메웠다.

왜… 쏜 거지?

분명, 순조롭게 설득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크리스텔도 진심으로 에데를 죽이고 싶은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어째서야…!

크리스텔

진짜 적이 누구인지, 떠올렸기 때문이라네. 단장이여.

나:

그러니까 에데는 적이 아니라고-

에데

내가 아니야.

나:

에데…? 괜찮아?

에데

날 쏜 게 아니라고.

봐. 총을 맞지도, 스치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조금 떨어져. 괜찮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만 달라붙고.

어, 어디까지 들춰보는 거야?! 너, 변태야?

나:

아, 아니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나: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에데

…크리스텔.

이 선택은 조금 의외인걸.

너라면…

너라면 분명 망설임 없이 나를 쏠 줄 알았는데.

크리스텔

에데여. 나 스스로도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다네.

허나, 단장의 열변에 나 또한 한가지 깨닫고 말았지 뭔가.

에데

깨달았다…고?

크리스텔

그래. 하마터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선택지를 고를 뻔했어.

에데여.

이 크리스텔이 모르세르에의 피의 복수를 서약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하고, 유린했다!

그렇기에 난 그 끝없는 절망을 놈에게 돌려주기로 한 것이지.

허나, 그 복수를 위해 모처럼 손에 넣은 나의 소중한 것을 다시금 빼앗긴다면.

그건 애당초 복수를 결심했던 이유와 너무나도 모순되는 것 아닌가?

에데여. 그대는 오롯이 나의 것일세.

에데

…

크리스텔

나의 직원이자, 복수의 동반자이며, 나의 피보호자.

…나의 동료여.

어리석은 나는 이제야 깨닫고 만 것이네.

그대가 바로, 모르세르가 나에게서 다시금 빼앗고자 한 것이었겠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결말을 위해서 말이야.

그런 가증스럽고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한 연극놀이를 좋아하는 이를, 우리는 알고 있지.

그렇지? 왕국의 현자-

아니 기만의 집행자 모르세르여.

스토리 및 일러스트 © Studio B-Side. 비공식 열람용 아카이브입니다 — 문의나 요청은 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