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3
움직이는 석상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에데와 크리스텔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그들이 말한 복수가 그만큼 두 사람에게 진지한 목표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역시 이렇게 무거운 공기가 지속되어서야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다.
뭐라도 말을 붙여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흠…! 흠.
목이 칼칼한데, 두 사람은 괜찮아?
크리스텔
아아. 음료라도 한 모금 하겠나? 탄산 음료랑 주스를 좀 챙겨왔는데.
고마워. 잘 마실게.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떤 관계야? 연인?
크리스텔
푸웁-! 케흑…! 쿨럭…!
에데
…연인? 너, 정신이 좀 이상한 거야? 우리가 그렇게 보여?
농담이야.
그냥, 엄청 가까운 사이 같아 보이길래.
크리스텔
호오? 갑자기 그런 걸 물어와서 놀랐군. 우리에 대해 궁금한가?
의뢰를 완수하기 전까지는 동료잖아.
동료에 대해서 많이 알수록 좋지.
크리스텔
어떤 관계라…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음, 에데의 보호자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옳을 것 같군.
말하자면, 엄마 같은 걸세.
에데
누가 니 딸이야…?!?!
…?
에데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아!
크리스텔
우-후후후! 허나 말 그대로지 않나?
의식 없이 쓰러져 있던 그대를 내가 주웠고, 직원으로 삼았으니.
비에 젖은 길고양이를 주워다 품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
어릴 땐 조금 더… 조그맣고 귀여웠다는 점까지 비슷하지.
에데
…누가 고양이야?
그리고 누가 조그맣고 귀여웠다고 그래? 난 원래 이랬어. 착각하지 말라고.
크리스텔
참고해 두게 단장이여. 에데는 부끄러움이 많거든.
에데
하아… 그냥 네 멋대로 해. 일일이 화내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아지니까.
그런데…
의식 없이 쓰러져 있었다?
에데
그래. 난 버려진 유적 한가운데에서 깨어났어.
크리스텔이 발견해 날 깨웠을 땐, 이미 잠들기 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였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쩌다가 잠들게 되었는지, 왜 나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조차.
뭐,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
그리고 여기가-

에데
그 유적이야.
이런 규모의 유적이 통째로 지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에데
정확히는 아무도 몰라.
당대의 역사서를 찾아봐도 제대로 적혀 있는 곳이 없거든.
애초에 이곳의 존재 자체가 일반에 알려져 있지 않아.
괜히 이름 없는 고대왕국이라 부르는 게 아니라고.
다만, 확실하게 남아있는 단 하나의 기억은…
모르세르가 멸망의 원인이었다. 그거 하나뿐이야.
…정말 여기에 모르세르를 쫓을 단서가 있을까?
크리스텔
높은 확률로 그럴 거야.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모르세르의 여러 가짜 신분들의 흔적을 조사해 왔다네.
허블과는 그걸 위한 협력 관계였고 말이야.
그런데 얼마 전, 그의 위장 신분 중 하나를 조사하던 중 이 석판을 발견했어.
이 이름 없는 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만들어졌던 석판이지.
그리고 모르세르는 왕국의 현자라는 신분으로 이 왕국에서 활동했다네.
과연 놈이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돌조각을 보관하고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단장이여. 분명 모종의 의미가 있었겠지.
그러니 이 석판을 시작으로 유적을 좀 더 면밀히 조사해 보려는 거야.
그런데 그 성문을 저 석상이 막고 있는 거고?
널찍한 가도 한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석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투구에 가려져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시선은 분명 우리를 향해 있었다.
정말 움직이네…
크리스텔
자세를 보아하니 우리를 경계하는 모양이야.
성문 안으로 들려는 침입자를 막는 게 목적이겠지.
오래된 유적에 문을 지키는 파수병 골렘이 숨겨져 있는 일은 종종 있거든.
저걸 뚫고 성문 앞에 도달한다…
쉽지 않겠는데.
크리스텔
지레 겁먹지 말게 단장이여.
비록 혼자서는 맞서기 어렵겠지만, 세 명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에데
석상의 시선을 끄는 건 나랑 크리스텔한테 맡겨.
넌 그냥 저 녀석의 눈을 피해 이 석판을 들고 달리면 돼.
성문 앞에 다다르면, 근처 바닥에 석판이랑 똑같은 모양의 홈이 있을 거야.
크리스텔
그대가 성공하면, 우리가 즉시 합류하도록 하지.
에데
신호하면 바로 달려.
맡겨둬.
석판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디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석상이 거대한 검을 뽑아 들었다.
크리스텔
역시, 얌전히 보내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에데
접근하기 전에 선공한다.
단장, 가-!
두 사람의 공격에 석상이 시선을 돌리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텔
에데여, 단장에게 신경 쓸 시간도 주지 말아야 하네!
에데
알고 있어! 크리스텔, 오른쪽!
크리스텔
흣-!
후후후… 스치기만 해도 뼈도 못 추리겠는걸.
에데
웃을 때가 아니거든?! 다시 온다!
크리스텔
나도 보고 있네. 최대한 관절 쪽을 노려서 움직임을 제한해보지.
바로 등 뒤에서 살벌한 소리들이 연이어 터지지만 뒤돌아보지 않는다.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석판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것.
그 이외에는 두 사람에게 일임한 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에데
…?! 잠깐, 저 녀석 낌새가 이상한데…!
크리스텔
치잇, 속았나! 처음부터 노리는 건 석판이었어!
단장이여! 몸을 숙이게!
반사적으로 몸을 숙인 순간, 거대한 검이 내 뒤통수를 노리고 쇄도했다.
육중한 바람 소리를 내며 휘둘러진 검은 아슬아슬하게 석판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때.
석상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돌진해왔다.
에데
…후우… 후우…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서있어?!
달리란 말이야.
고마워…!
에데
됐어. 그런 말 할 기운 있으면 얼른-
크리스텔
에데여, 아직 끝나지 않았네…!
에데
…?!
석상의 손아귀가 에데를 덮쳐온다.
하지만, 그 커다란 손은 에데에게 닿기 직전 우뚝 멈춰 섰다.
에데
…뭐, 뭐야?
무릎을 꿇었어…?
크리스텔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살았군.
에데, 단장. 모두 일어서 달리게!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니!
별안간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석상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재빠르게 달아났다.
에데
저기야! 저 검은색 제단 아래에 석판을 꽂아!
꽂았어!
크리스텔
성공이군. 문이 열리고 있네!
들어가자!
성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인식이라도 했다는 듯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에데
문, 조금 더 빨리 닫을 수는 없어?
저 녀석, 정신을 차린 것 같아 보인다고.
크리스텔
크으읏… 최대한 밀어보고는 있는데… 무거워서 더 이상 빠르게는…!
본다! 우릴 보고 있어!
에데
더 빨리!
크리스텔
그러니까, 이게 제일 빠른 속도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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