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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5

왕국의 현자

에데

…여기서 이렇게 여유롭게 보낼 시간 따위…

…칫.

나:

에데, 많이 화난 것 같은데?

크리스텔

그도 그렇겠지.

그토록 쫓아왔던 현자가 바로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솔직히,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쳐들어가고 싶다네. 하지만-

에데여. 서두른다고 일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아.

그렇게 해결될 문제였다면 이미 진작에 놈의 심장에 내 총탄이 박혀있을 거야.

나:

그래.

나: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비상식에 휩쓸렸어.

크리스텔

성문 앞의 거대한 석상은 갑자기 살아나 우리를 공격하고…

오랜 세월 버려진 유적 속에선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어.

심지어 그 정체는 오래전 멸망한 고대 왕국의 시민들이지.

하물며 시간을 거슬러 고대로 온다는 건, 아예 기존의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현상이야.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릿속이 어지러워.

나:

차분히 숨돌릴 시간 정도는 필요하단 거지.

에데

그렇지만…!

나:

너무 걱정하지 마.

나:

내가 도와줄 테니까.

에데

흥. 쓸데없는 빈말은 그만둬. 나도 잠깐 머리를 식혀야 한다는 덴 동의하니까.

…그리고, 뭔데 그 낯간지러운 격려는?

칫… 차라리 화를 내라고. 우리 때문에 이상한 일에 휘말려 버렸잖아.

나:

약속은 약속이니까.

나: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에데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되나 본데,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고?

뭔가 잘못되어서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나: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힘내야겠네.

에데

…멍청한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크리스텔

우-후후후! 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걸?

단장이여, 그대가 여정의 단장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군.

그래. 실패 같은 건 가정할 필요도 없지.

나, 크리스텔 드 몬투아는 언제나 바라던 바를 이루었으니까!

에데

하아… 바보가 두 명이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크리스텔

뭐가 되었든 일단은… 현자를 찾아내는 게 먼저겠지.

나:

발견해도 죽일 수는 없을걸?

크리스텔

그게 무슨 소리지?

나:

타임 패러독스가 일어날 테니까.

나:

여기가 진짜 과거라면 말이지.

크리스텔

…과거의 시점에서 현자를 죽이면 미래가 바뀐다… 맞는 말이군.

그가 여기서 죽었다면 에데와 나는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 이곳의 우리의 존재도 성립될 수 없지.

우-후후후! 아주 날카로운 지적일세 단장이여.

…하지만, 우린 그 녀석을 딱히 지금 여기서 죽일 필요가 없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모르세르를 특정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에데여?

에데

…설마 그걸 쓸 셈이야?

크리스텔

그편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에데

하아… 네가 결정한 거라면. 알겠어.

그게 뭔데…!

나: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에데

집행자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무언가라는 건 알고 있지?

그들은 인간이 아니야. 물과 음식, 공기가 아니라 공허의 힘으로 살아가는 공허체야.

그리고 집행자 정도 되는 거물 공허체들은 그 공허의 힘이 고유한 특성을 가져.

말하자면 사람의 지문 같은 거야. 서로를 구별하는 신분 같은 거랄까.

나:

나는 한 번도 못 느꼈는데.

나:

공허체와 전투라면 여러 번 해봤다고.

에데

그야 당연하지. 그걸 볼 수 있는 건 같은 공허체가 아니면 불가능하니까.

나:

그럼 공허체를 포섭하기라도 하자는 거야…?

에데

…농담이지? 공허체가 무슨 동네 강아지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나: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크리스텔

후후!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에데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크리스텔은 볼 수 있거든.

크리스텔

아아. 이 저주받은 힘은 내게 끝없는 고통을 주지만…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겠군그래.

크리스텔은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던 머리칼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숨겨져 있던 붉은 눈동자를 눈에 담자,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크리스텔

읏…! 크읏…!

나:

괜찮아…?!

에데

…하아. 괜찮아.

또, 악몽을 꾸었을 뿐이니까.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어깨를 으쓱거린 에데가 크리스텔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가 점차 부드럽게 변했다.

나:

악몽…?

크리스텔

…아무것도 아닐세. 그런 것보다… 이 눈을 보고, 무엇을 느꼈지?

겁이 나던가? 혹여 그렇다 해도 부끄러워하지 말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나:

겁이라기 보다는…

나:

오싹한 느낌이 들었어.

크리스텔

호오… 후후! 역시 알리시아가 선택한 인재인가?

보통 사람이라면 이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벌 떠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낼 수 있다는 건, 그대의 심지가 놀랍도록 굳다는 뜻이지.

나:

그 눈은… 어떻게 된 거야?

크리스텔

내 오른쪽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네.

이미 완전히 공허의 힘에 잠식되어 있으니 도리어 공허체의 그것에 가깝지.

나:

…!

크리스텔

이유를 묻는 듯한 표정이군.

말하자면 길지만, 모르세르가 이렇게 만들었다고만 해두지.

놈이 말하길, 날 집행자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던가?

하지만 걱정말게나. 나는 끝내 집행자 따위가 되지 않았으니.

에데

정리하자면 이 시대에 존재하는 현자를 잡아서…

그 녀석의 공허를 크리스텔의 능력으로 흡수해 분석한다.

그럼 현재 모르세르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이거네.

크리스텔

그래. 문제는…

어떻게 현자에게 닿을 거냐는 거겠지.

에데

그 자식, 왕궁의 깊은 곳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는다고 했잖아.

여기서 우리는 수상하기 짝이없는 외지인이라고.

우리를 왕궁 안으로 들여보내 줄 리 만무하잖아.

그렇다고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왕궁을 무력으로 진입할 수도 없고.

크리스텔

자고로 사업가의 기본 소양이라 함은 정보 수집 아니겠나?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길은 있는 법.

왕궁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

걱정할 것은 어디에도 없네! 이 크리스텔 드 몬투아는 언제나 답을 찾아왔으니!

에데

…크리스텔.

크리스텔

우후후후… 후후…

에데

자신 있게 말한 것 치고는 아직도 방법을 못 찾은 것 같은데? 웃음이 나와?

크리스텔

그, 그건…! 으으… 어쩔 수 없잖나.

왕궁에 물자를 대는 상인들은 최소 한 달은 넘는 사전 승인을 거쳐야 한다고 하고…

왕녀의 역병 탓에 왕궁의 경계가 강력해진 탓에 루트가 전무하다시피 한 걸…

에데

흐음… 너도 변명 같은 걸 하는구나? 단순하게 실패한 것뿐이잖아.

크리스텔

터, 터무니없는 굴욕…! 이 내가 실패하다니…

읏… 면목 없군.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을지도.

그, 그래도 분명 우리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한 것뿐이겠지.

필시 좋은 방법이 남아 있을 터…!

…아마도.

나:

그건 그렇고 이상하네.

에데

…이상하다니. 뭐가 말이야?

나:

에데는 어디에 있는 거야?

에데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 눈앞에 있잖아.

갑자기 시력이라도 나빠진 거야?

나:

그게 아니라-

나:

과거의 에데 말이야.

에데

…어?

크리스텔

호오… 과연 그렇군.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이곳은 에데가 잠들기 직전의 과거.

게다가 현자가 왕국에 있다는 말은 에데가 살았던 시기와도 겹친다는 의미.

그렇다면 분명 과거의 에데 또한 이곳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리일텐데…

왕성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에데와 비슷한 자를 목격한 적이 없네.

에데

…밖에 돌아다니길 싫어하는 성격이었나보지.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크리스텔

아니. 그렇다 해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지 에데여.

적어도 누군가는 그대를 알아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어찌 된 영문인지 신경 쓰이는군.

에데

흥.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낭비하지 마.

정작 당사자인 나는 딱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니까.

나:

기억을 잃어버렸다며?

나:

이게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크리스텔

흐음… 과거의 본인을 만나면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으니. 타당한 의견이군.

에데

하아… 됐어. 필요 없어.

…그깟 기억 따위, 없어도 잘만 살아왔어.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복수야.

크리스텔

…그런가? 에데여, 그대는 그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에데

…전혀.

내가 지금 그런 걸 궁금해할 것 같아?

정신 차려. 그 모르세르가 바로 이곳에 있다고.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할 거라면 나 먼저 움직이겠어. 왕궁으로 들어갈 방법이나 더 찾아볼 거야.

크리스텔

…기대하던 모습과 다를까 봐 겁나나?

에데

…내가 뭘 기대하는데?

크리스텔

흐으음… 그건 알 수 없지. 그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따금씩 그리워하지 않았나?

에데

헛소리…! 기억나지도 않은 걸 그리워할 리가 없잖아!

크리스텔

에데여, 그대는…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군.

보호자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자신을 도외시 한 채 복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란, 외로운 거라네.

더군다나 자신을 잃어버린 삶은 더더욱 외롭고 고독하지.

정말, 과거를 엿보고 싶지 않나?

에데

…알고 싶지 않아.

적어도, 지금은.

크리스텔

그런가.

…뜻이 그렇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네.

때로는… 잃어버린 것을 축복으로 여길 기억들도 있는 법이니까.

에데와 크리스텔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무렵.

행상인 A

어이, 들었어? 마르코 녀석이 대박을 쳤다는데.

행상인 B

대박? 무슨 대박?

행상인 A

그 자식, 남쪽 나라로 상행 갔었던 건 기억하지?

그런데 돌아오던 길에, 길을 잃은 사절단을 만났다는 거야.

행상인 B

사절단?

행상인 A

그래. 근데 마침 그 사절단이 저기 남쪽 바다 건너 섬나라에서 온 사절단이더라는 거지.

그 왜, 왕녀님을 치료할 비약의 재료를 구한다고 여기저기 기사들을 보냈잖아.

행상인 B

거 운세 한번 기가 막히네.

행상인 A

듣기로 동대륙의 제국에도 약초를 하나 구해달라고 요청했다던데, 나도 한번 길목에서 기다려봐?

크리스텔

…호오? 저건, 이용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이는 정보인걸.

에데

…뭘 어쩌려고?

크리스텔

우-후후후! 나만 믿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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