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11
꼭두각시 인형극

크리스텔의 낮게 깔린 분노가 쏟아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구잡이로 쌓인 시쳇더미 속에서, 무언가 꿈틀하더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서 누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너는… 시종장?
모르세르
하아… 재미없어.
거의 속아 넘어간 줄 알았는데, 김이 팍 식잖아.
크리스텔의 총에 맞아 구멍이 뻥 뚫린 상처가 아이스크림처럼 뚝뚝 녹아 떨어지더니 금세 아물었다.
모르세르
그나저나… 과연 내가 제일 아끼던 장난감답네.
얕보면 안 된다니까?
그래서,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크리스텔
그 입 닥치게 가증스러우니.
뭔가 정보를 캐내고 싶은 거라면 관두는 게 좋아.
네게 어떠한 정보도 알려줄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까.
모르세르
아아~ 너, 어느새 이렇게 재미없는 녀석이 되어버린 거야?
예전에는 좀더… 뭐랄까…
순진한 새끼 강아지 같은 맛이 있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똘망똘망하게 눈을 반짝이면서 철석같이 믿는 개 말이야.
오랜만에 멍멍 짖어볼래? 어서, 멍멍?
크리스텔
…죽이겠다. 반드시.
모르세르
에이, 너무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라구.
오랜만의 재회잖아?
그러고 보니 오른쪽 눈은 어때? 내 선물은 잘 쓰고 있는 거지?
크리스텔
그 입… 닥치라고 했네.
어차피 본체가 남긴 찌꺼기에 불과한 주제에 입만 나불나불거리는구나.
모르세르
와아… 거기까지 알아차린 거야? 대단한걸.
수고했다고 쓰담쓰담이라도 해줄까? 아하핫!
어머나?! 깜짝이야.
에데
…아쉽게 됐네. 시끄럽기만 한 주둥이를 날려버릴 셈이었는데.
모르세르
에헤~ 우리 주연 배우님이 화가 많이 났나 보네?
마음에 안 들었어? 나름대로 내 역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데
한마디만 더 하면, 사지를 찢어주겠어.
모르세르
어머… 무서워라.
하지만 뭔가 거꾸로 되었는걸? 화를 내야 할 건 너희들이 아니라 나라구.
그리고… 거기 너.
나?
모르세르
그래. 너 말이야. 넌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네놈이 전부 망쳤잖아.
너 하나 때문에 내가 모처럼 공들여 설계해 뒀던 아름다운 한 편의 비극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구.
이거 어떻게 책임질 셈이야?
크리스텔
책임? 웃기지도 않는군. 우리의 복수가 완성되는 그날에도 그렇게 이죽거릴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모르세르
으음~ 우리라고? 그래…?
우리 가여운 왕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복수, 할 거야?
어라라! 그런데… 그 복수는 누구를 위한 복수일까?
이 풍경을 봐. 전부 네가 저지른 짓이잖아, 왕녀 아가씨?
설마… 자기가 전부 죽여놓고 내 탓을 하려는 건 아니지? 그렇지?
크리스텔
에데여. 놈의 거짓을 속삭이는 혓바닥에 속지 말도록.
모르세르
에에~ 나는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우리 왕녀 아가씨라면 잘 알고 있을걸?
에데
…
크리스텔. 저 녀석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거짓말이지만-
이건… 네가 엿본 내 기억만큼은… 가짜가 아니야.
녀석에게 속았다고는 해도, 결국 왕국을 이렇게 만든 건 내 탓이야.
내가… 모두를 죽이고 왕국을 멸망시켰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크리스텔
헛소리.
에데여. 많이 나약해졌군. 적의 기만술에 그리도 손쉽게 넘어가다니.
에데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걸.
이제 생생하게 기억이 되돌아왔다고.
…아니.
그게 아닐 수도 있어. 에데.
에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크리스텔
우-후후후! 단장이여, 그대도 이 위화감을 눈치챈 것인가?
에데
그게 무슨 소리야?
크리스텔
에데여. 일전에 그대가 말했듯-
이 공간은 그대의 의식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잊혀진 기억에서 비롯된 공간.
그 탓에 이 세계에는 조금씩 어긋난 곳이 존재한다네.
에데
어긋난 곳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게 설명해.
크리스텔
아직도 모르겠나? 현자의 방이 텅 비어 있던 이유를?
그것은, 단순히 비어 있다는 수준이 아니었어.
존재하지 않는다에 가까웠지.
에데
잠깐.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크리스텔
잠자코 듣게 에데여.
그대는 저 역겨운 거짓말쟁이가 늘어놓은 가짜들 사이에서 진실을 마주해야 하네.
조금만 주의 깊게 살핀다면 이상한 점은 그거 하나뿐이 아니니까.
아마 단장도 지금쯤이면 눈치챘을 테지?
…저 시체들.
크리스텔
후후… 정답이군.
에데
시체들이 뭐…?
상처가 없어.
에데
…뭐? 그럴 리가. 분명 피를 쏟으면서-
크리스텔
에데여. 한번 잘 생각해 보게.
그대가 본 기억이란 것은, 정확히 어떤 것이었나?
그대의 창으로 왕궁의 궁인들을 직접 베고 꿰뚫는 감각?
그렇다면 어디를 베었지? 불쌍한 메이드가 숨이 끊어질 때, 마지막 단말마는 무엇이었나?
에데
그건… 내가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크리스텔
그래. 죽어있었겠지. 에데여, 그대에게 사람을 죽인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에데여. 왜냐하면…
그대는 그런 일을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건 저 녀석이 만들어낸 그럴듯한 정황일 뿐이지.
교묘한 기만이고, 계산된 거짓. 놈의 장기지 않나?
모르세르
흐응… 그래에?
내가 왜 그렇게 귀찮은 짓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크리스텔
…아직까지 그런 역겨운 기만을 이어갈 셈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대가 원하는 건 나와 에데의 완전한 파멸일 테니까.
이 꿈속 공간은 전적으로 에데의 기억에 기반해.
거꾸로, 에데의 기억에 없는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비어 있지.
에데가 가본 적 없는 현자의 방이 그 증거였다.
그대가 본 적이 없으니 존재부터 잘려 나가 있던 것이다.
이 거대한 환상은 이렇듯 온통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네.
그저, 그대의 기억에 기반해 그럴듯한 것들을 꾸며 늘어놓았을 뿐.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한가지 결론이 도출되지!
에데
설마…
크리스텔
에데여. 내가 그대를 죽인다 해도 모르세르의 흔적을 얻을 수 없다.
그대는 나와 달리 공허를 읽을 눈이 없기 때문이야.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억할 리가 없지 않나?
그 말은 즉…
크리스텔
처음부터 정답 같은 게 없는 선문답이었다는 소리다.
아마 모르세르, 네 녀석이 바라던 장면은…
내가 끝내 네 계략에 속아 에데를 쏘아 죽이고 난 뒤, 진실을 깨닫고 절망하는 장면일 테지.
그렇지?
잠자고 크리스텔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종장, 모르세르는 고개를 푹 떨구곤 어깨를 들썩거렸다.
모르세르
…큿.
…크크큭.
푸하하하하! 대단해! 대단한 걸! 진심으로 대단해!
하아… 이 기억과 감정들이 내 본체에게도 전달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정말로 아쉬워서 배가 아플 지경이야.
우우… 어떻게 방법이 없으려나?
그치만… 내 본체, 지금쯤이면 이미 죽었을 테고. 소용없나?
모르세르가 이미 죽었다고?
크리스텔
단장이여.
상대는 기만의 집행자라네. 저 말을 믿나?
귀를 기울일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거짓말이야.
크리스텔이 쏘아낸 탄환을, 모르세르는 대수롭지 않게 낚아채 만지작거린다.
모르세르
와하핫! 또 들켜버렸어?
뭐어, 본체 따위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게 뭐야!
그런 건 알아봤자 하나도 재미없는걸.
그래도… 아쉽네에~ 조금 더 가지고 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흥. 이제 됐어. 너희들, 재미없으니까 그만 버릴래.
모르세르가 권태로운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뭔가 커다란 것이 땅을 울리며 돌진해온다.
근위대장
왕실 근위대장… 왕녀님께… 영원한 충성을…
에데
저건…!
크리스텔
…세뇌인가. 그 고약한 짓을 아직도 하고 다니는군.
모르세르
하핫! 설마 내가 순순히 보내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어디한번 할 수 있는 만큼 발버둥 쳐봐.
그것도 뭐… 마지막 유희로는 나쁘지 않아 보이네. 흐응~
크리스텔
…목이나 닦고 기다리게. 반드시…
널 죽이러 갈 테니까.
모르세르
아이, 무서워라.
그 각오, 아까 조금만 더 써줬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절망하는 표정, 꼭 보고 싶었거든.
에데
그 입 닥쳐…! 사람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쓰레기가…!
모르세르
아하핫! 우리 인형 아가씨도 기운이 완전히 돌아왔구나?
아무튼, 힘내보라구! 살 수 있으면 살아줬으면 하거든.
특히, 넌 나를 가장 많이 닮은 장난감이니까.
크리스텔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꺼져라. 찌꺼기 주제에 말이 많군.
모르세르
헤에… 이제 와서 부정하려고?
사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아무리 내가 말한 거라지만, 이것만큼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아, 그리고!
…너.
살려달라고 부탁한다면 너는 여기서 먼저 꺼내줄 수도 있는데. 어때?
처음엔 조금 화가 났는데…
너, 재미있어 보여. 여기서 죽는 건 아깝잖아.
거절하지.
싸이코랑은 말 섞고 싶지도 않고.
모르세르
와하핫-! 와아, 성깔있네?
그렇다면 뭐…
운이 좋아서 살아 나간다면, 나중에 또 보자고.
본체가 널 발견하면 아주 즐거워할 거야.
아, 이미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려나~?
크리스텔
후우…! 입만 나불거리는 방해꾼도 이제 없겠다, 남은 건 여기서 나가는 것뿐인가.
근위대장
…크후우…
크리스텔
후후후! 저 덩어리를 처치하려면 힘 좀 들겠는걸?
에데
…멍청이.
그냥 내가 나가라고 할 때 나갔으면 이렇게 일이 복잡해질 일도 없었잖아.
멍청이만 둘이나 모여서는… 차가운 이성이 어쩌고 한 주제에
크리스텔
그래. 하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그대가 살아 숨 쉬고 있지 않나?
단장이여. 그대는 그대의 결정에 후회하나?
전혀.
크리스텔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군. 장애물이야 언제든 우리 앞을 가로막아왔으니.
해야 할 일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그러니, 한바탕 뒹굴어보는걸세.
스토리 및 일러스트 © Studio B-Side. 비공식 열람용 아카이브입니다 — 문의나 요청은 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