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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잔화의 메타바시스 · 챕터 4

고대 왕국

크리스텔

후우… 간발의 차였군.

…문을 열고 쳐들어오지는 않겠지?

나:

…

에데

…혹시 모르니까 빨리 거리를 벌리는 게 좋겠네.

크리스텔

그런데, 나가는 쪽 문은 어디에 있는 거지?

빛이 하나도 없어서 방향을 모르겠군.

에데

어쩔 수 없잖아. 벽이라도 짚어가면서 파악할 수밖에.

…읏?!

누, 누구야! 내 몸에 손대지 마…!

나:

미안! 앞이 안 보여서…

에데

눈이 안 보여도 목소리는 들리니까 위치 정도는 짐작할 수 있잖아!

흐읏…?! 또 만졌어!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변태! 쓰레기!

나:

아니야…! 진짜 아니야…!

크리스텔

…음? 다들 조용히. 찾은 것 같아.

이쪽이 경첩일 테니까… 여기가 빗장일 테고…

빗장을 밀어서…

자, 이제 문을 열겠네.

열린 문 사이로 눈부시게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암흑에 겨우 적응했던 눈이 비명을 지르는 듯 따가워 눈을 뜨기 어렵다.

에데

으읏… 무슨 빛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크리스텔

…

에데

…이게 뭐야.

나: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크리스텔

아니. 단장이여, 그대가 보고 있는 광경을 나도 똑똑히 보고 있네.

그리고, 그 광경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도 알지.

에데

…이럴 리가 없잖아.

크리스텔

…그래. 지하 깊숙한 곳에 처박힌 유적에 해가 떠 있을 리가 없지.

나:

사람들도 있을 리 없고.

마부

저리 비켜-! 길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에데

이건… 이상해.

우리가 들어온 건 지하 깊숙이 묻힌 채 까마득한 세월 동안 버려진 유적이었다고.

우리가 갑자기 순간 이동이라도 했다는 거야…?

크리스텔

…여기서 우리끼리 감상을 주고받아봤자 현실 부정밖에는 안 될 것 같군.

일단 조금 걸으면서 상황을 파악해 보자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에 섞여 거리를 걷다 도착한 곳은 시장이었다.

에데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시장으로밖엔 보이지 않네.

수상한 점은 딱히 보이지 않아. 이 사람들이 전부 연기를 하고 있을 리도 없고.

크리스텔

음. 에데여,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네.

…믿기 어렵게도.

단장, 배가 출출한가보군?

나:

아까 좀 격하게 달렸더니…

크리스텔

우-후후후!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네.

뭐가 어찌 되었든, 일단 허기를 좀 달랜 다음에 생각해 볼까?

과일 상인

어서 오십쇼! 무엇을 드릴까요?

크리스텔

음… 사과 세 개만 주시게.

과일 상인

사과 세 개. 알겠습니다. 자, 하나에 동전 한 개씩 되시겠습니다.

크리스텔

여기 있네.

과일 상인

어… 돈을 주셔야죠 손님?

크리스텔

음? 방금 동전 세 개 주었잖은가?

과일 상인

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진짜 돈을 주셔야죠. 이런 동전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크리스텔

그게 무슨 소리지? 이 동전은 라비스타 전역에서 쓸 수 있는-

…설마?

에데

…물어볼 게 있어. 여기에서 NOA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과일 상인

NOA요…?

노아… 노아라… 처음 들어보는 지명입니다만.

멀리서 오신 여행객분들이십니까?

어쩐지 쓰는 화폐도 다르고, 옷차림도 특이하시더라니.

나:

NOA를 모른다고…?

크리스텔

…단장이여. 잠시 저길 봐주겠나?

크리스텔은 과일 가게의 진열대 한쪽에 놓여있던 나무 팻말을 가리켰다.

가격표인 듯한 팻말에는 처음보는 문자들이 서투른 글씨체로 파여져 있다.

나:

외국어인가 봐. 전혀 못 읽겠어.

크리스텔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라네.

이 문자는, 고대 왕국시절 쓰였던 고대 문자거든.

나:

고대 문자?

크리스텔

주인장 미안하네만, 물을 좀 얻어 마실 수 있겠나?

과일 상인

물이라면 저쪽 광장에 있는 우물에서 드시면 됩니다만.

에데

수도꼭지 같은 건 없어?

과일 상인

수도꼭지…가 뭡니까?

나:

…어라?

크리스텔

…그런가. 고맙네. 사과 값은 이 금반지로 대신 치를 수 있겠나?

남는 건 이곳에서 쓰는 동전으로 좀 바꿔주면 고맙고.

흥정소리와 잡담, 번잡한 발걸음이 이리저리 뒤섞인 거리의 풍경이 갑자기 낯설게만 느껴진다.

에데

설령 동대륙이라 하더라도 NOA의 존재는 널리 알려져 있어.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야.

크리스텔

이들이 말도 안 되게 긴 세월 동안 외부와 고립된 생활을 했을 수도 있지.

아니면…

에데

아직 NOA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거나.

아니, 되려 현재로선 그게 가장 유력한 가능성이라고 봐야 할 거야.

나:

타임트립인가…

로베르타

캬…! 시원하다! 아무튼 단장, 그래서 있지?

내가 설마~ 하면서 나가보니까 루그랑 나루의 말이 진짜였던 거야!

말하자면 폴라리스 본부 건물 내부를 빙글빙글 돌게 되어버린 거지.

아 참,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막 말하고 다니면 안 되니까?

어쨌든 그래서-

클레어

…그렇게 카넬리아님의 일기장은 과거의 캔들 스퀘어를 투영한 세계의 연결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벨은 그곳에서 과거의 일을 재현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반복되는 시간 혹은 공간.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게 단순한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문득 피어난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크리스텔

타임트립…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과거로 와버린 것 같아.

이 이름없는 고대 왕국이 멸망하기 전의 과거 말이지.

시대로 따지자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별의 구원자가 활동하기 이전.

…정말 까마득하게 옛날인걸.

에데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거지?

크리스텔

아직 추측에 불과한 정도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저 성벽이 가장 의심스럽군.

에데

성벽?

크리스텔

그래. 극히 미세하기는 하지만, 저 성벽에서 어떤 힘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거든.

못 믿겠거든 눈을 감고 땅에 손을 짚어보게.

크리스텔의 말을 따라 땅에 손을 댄 채 정신을 집중하자, 찌릿한 감각이 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크리스텔

힘이 향하는 방향은… 성의 중심부인 것 같고.

에데

그건, 왕궁이랑 이어져 있다는 소리?

크리스텔

저 안에… 뭔가가 있다는 소리겠지.

한가지 조금 걸리는 건, 성벽 바깥으로 향하는 한 줄기가 더 있는 것 같다는 건데…

흐음… 구체적인 건 이제부터 알아내면-

에데

뭐, 뭐야? 사람을 치고 갔으면 사과라도-

병사

모두 길을 비켜라-!

왕실 친위 기사단의 행진이다-!

크리스텔

기사단의 출정 기념 행진이라… 하나같이 숙련된 기사들인걸.

이 정도의 규모라면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

구경꾼

으음…? 차림새를 보아하니 외지인 같은데 그것도 모르나?

기사단은 왕녀 전하의 약을 찾으러 가는 거라네.

나:

왕녀 전하가 많이 아픈가요?

구경꾼

허어? 이거 완전히 이곳 사정에 깜깜한가 보구만?

왕녀 전하가 괴질로 앓아누운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에데

괴질?

구경꾼

그래. 쯧쯔… 왕녀님이 어쩌다 그런 몹쓸 병에 걸려버렸는지.

현자님이 아니었다면 벌써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던데… 천만다행인 일이지.

에데

…뭐?

현자? 방금 현자라고 했지?

구경꾼

어어?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나? 내가 뭐 말실수라도 한 거야?

크리스텔

에데여. 진정하게.

에데

……

크리스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줄 수 있겠나? 우리가 이곳 사정에 조금 어둡거든.

구경꾼

뭐… 여기선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왕국의 현자님이 괴질에 걸린 왕녀님을 위해 여러가지 시술을 해주셨다던데.

결국 왕녀님의 병을 고칠 명약을 개발했다고도 하고.

그래서 기사단이 그 재료를 구하기 위해 대륙 각지로 파견되고 있는 거야.

이거면 궁금한 점이 풀렸나?

에데

크읏…

크리스텔

…에데여, 진정하게. 일반 대중들에게 놈의 진짜 정체는 알려져 있지 않아.

공연히 의심을 살 격한 감정은 숨기게.

에데

…칫. 그 현자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 지금 어디에 있지?

구경꾼

그야 현자님은 왕궁에 계시지. 왕녀님을 구할 비약을 만드시느라 외출할 시간도 없다더군.

그런데, 이곳 사정에는 어두우면서 용케 현자님에 대해서는 아는 눈치구만?

크리스텔

우후후… 사실 우리도 그 현자님께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네.

그래서 이 머나먼 왕국까지 찾아온 거지.

이야기 들려줘서 고맙네. 우린 먼저 가지.

에데

잠깐 기다려 크리스텔. 아직 더 알고 싶은 게-

크리스텔

머리를 냉정하게 식히게 에데여.

저 자는 그저 평범한 구경꾼일 뿐이야.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충분히 알아냈어.

내가 복수를 성공하기 위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일러준 적이 있었지?

에데

차가운 이성 속에 뜨거운 복수심을 감춰라.

…알고 있어.

크리스텔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일단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말과는 달리 아직 마음이 붕 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에데는 크리스텔의 손에 마지못해 이끌려갔다.

나:

왕녀와 현자라…

나도 모르게 두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을 즈음, 행진 행렬의 끝에서 말을 몰던 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기분이 들었다. 투구에 가린 얼굴이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으니까.

크리스텔

단장이여. 어서 오게. 사람이 많으니 미아가 되지 않게 주의하고.

나:

아, 가고 있어.

문득 그 기사의 생김새를 떠올리자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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