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연구 · 챕터 2
베이커가로 온 의뢰서

어느 평범한 날 오후.
베이커가 221B 사무소 안.
릴리
차를 내왔어요. 교수님.
프로페서M
감사히 마실게요. 릴리 양.
릴리
지금 읽고 계시는 그 책, 추리 소설이죠?
교수님이 추리 소설을 읽으실 줄은 몰랐네요.
프로페서M
서운한 언사군요. 저는 추리 소설을 좋아한답니다.
인간의 추함을 지성으로 해부하는 훌륭한 문학 아닙니까.
릴리
교수님이 추리나 수수께끼에 흥미를 느끼실 줄은 몰랐거든요.
프로페서M
확실히… 저는 예나 지금이나 문제를 풀기보단 출제하는 사람이죠.
릴리
그럼 교수님은 무엇을 위해 추리 소설을 읽으시는 건데요?
프로페서M
제가 읽고 싶은 건 오직 하나. 범인의 악의입니다.
악의가 선명하고 짙을수록 극은 생생해지죠.
복수심이나 원한도 좋지요. 인간이 타인을 파멸시키기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제가 인간의 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 아니 티끌만도 못한 거 아닌가 싶어 경이로울 정도예요.
릴리
역시 교수님 같은 천재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네요.
프로페서M
과찬이군요. 저도 알지 못하는 지식은 너무도 많습니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도 어디에나 있죠.
당장 이 공간을 예시로 들어볼까요.
최근 람파디스 수사 컨설팅으로 간판을 바꾸기 전에 여기 있던 그 사무소 말입니다.
릴리
아, 베이커가 탐정 사무소 말인가요?
프로페서M
공교롭게도 저희와 같은 업종이죠. 그 쪽은 이미 유명하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릴리
사장님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이름을 굳이 바꿨죠.
프로페서M
굳이 그래야 했을까 몰라요. 이 사무소는 우릴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는데.
가구 배치부터 취향까지 전부 다요.
릴리
네. 그래서 무언가를 새로 살 필요도, 버릴 필요도 없었죠.
프로페서M
마치 막 1막이 끝나고 무대장치만 남겨진 것 같지 않나요.
저희는 그 위에 등장한 2막 배우고요.
릴리
우리의 삶이 누군가 써둔 대본과 같다는 것인가요?
프로페서M
혹은 누군가가 특이점에 도달해 버린 결과일 수도 있고요.
릴리
특이점이요?
프로페서M
저는 개인적으로 꽤 지지하는 가설이랍니다.
어떤 강대한 힘과 의지를 지닌 인물에 의해서-
세계의 시간선과 개체들의 운명이 뒤섞여 버린 것이죠.
만약 이 세계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우리 둘 다 기억하는 한 친구가-
딱 지금 제 자리에 앉아 파이프를 물고 있지 않았을까요.
릴리
…!
프로페서M
어쩌면 그날 회색빛 물안개 속으로 사라진 건 그 친구가 아니라 저일 수도 있고요.
저는 오히려 그 편이 훨씬 더 좋았을 거라고 자주 생각한답니다.
릴리
그 사람은 설령 운명이 바뀌었어도 교수님처럼 허무해하지 않았을 거예요.
프로페서M
그렇겠죠.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릴리
결국 차는 또 한 모금도 안 드셨네요. 치워 드릴게요.
프로페서M
이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요.
저는 책을 마저 읽고 있을 테니 천천히 하시길.
교수가 책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릴리가 말했다.
릴리
그 책 범인. 처음에 나온 마부야.
프로페서M
…!
릴리
토끼 씨! 스포일러는 안 돼! 어머, 죄송해요. 교수님.
하지만 토끼 씨가 교수님께서는 서문만 읽고도 범인의 정체를 아셨을 테니 상관없으실 거라면서도 미안하다고 하네요. 잘못했지? 토끼 씨.
프로페서M
후후. 괜찮답니다. 마부가 왜 영주를 죽이고 싶어했을까?
동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제게는 흥미로운 과정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끼 씨가 좋은 생각할 거리를 주셨네요.
릴리
…교수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쾅 열렸다.
그웬
다들 사건이야!!
뭐야? 교수님이랑 릴리 또 싸웠어? 분위기 왜 이래?
프로페서M
설마요. 유익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답니다.
릴리
교수님 말대로 이야기 중이었어. 사장님.
그웬
안 싸웠지? 그럼 됐어. 그보다 진짜 사건이야, 사건!
그웬은 호기롭게, 조잡한 디자인의 신문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웬
다들 주목! 아포칼립스 상단 꿈의 미백 크림 도난 사건!
범인은 소문의 미소녀 괴도 샤샤인가!
샤샤는 무려 네 번이나 치안국의 철통 같은 감시를 따돌렸어!
그런 괴도를 우리가 붙잡는다면!
프로페서M
그웬 양이 평소 꿈꾸던 대로 람파디스의 명성이 널리 퍼지겠군요.
그웬
헤헤! 그렇지? 알아들었으면 장비 챙겨!
괴도 샤샤는 우리가 잡는다!
그웬의 우렁찬 선언에 프로페서M은 조용히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릴리는 달그락거리며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웬
어, 어라? 다들 반응이 왜 이래? 괴도를 잡자니까?
릴리
…사장님. 그 사건 치안국이 해결했어.
그웬
뭣?!
릴리
치안국 수사팀이 이중 함정으로 샤샤를 완전히 속여 넘겼대.
그래서 현행범으로 붙잡는 데 성공했어.
참고로 괴도 샤샤의 정체는 미소녀가 아니라 수염 난 아저씨였고.
그웬
뭐어어?! 그것까지 밝혀냈다고?! 치안국은 요즘 왜 이렇게 유능한 거야!
분명 내가 치안국에 있었을 때만 해도 으윽! 도저히 모르겠다! 명탐정을 불러와! 하던 곳이었는데!
릴리
안 돼 토끼 씨… 그건 치안국 시절 사장이 무능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라니…
그웬
크악! 너 속마음이지? 이거!
릴리
아, 사장님. 토끼 씨가 그러는데…
설마 괴도 샤샤에게 네 번이나 당했다는 수사관이 사장님이었냐고 묻는데?
그웬
세 번이야!! 세 번이라고! 첫 번째 사건 담당은 내가 아니라 2팀이었어!
프로페서M
공평한 비교는 아니겠지요.
지금 치안국과 타운가드에는 우수한 자문위원이 많으니까요.
그웬
그만! 우리도 유명해지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이야!
우리 사무소가 유명해지면 사라진 명탐정 H 본인이나…
그녀의 실종에 관계된 녀석들이 우릴 찾아올 거 아니야!
프로페서M
….
프로페서M은 책장을 넘기던 손길을 멈추고 그웬을 바라보았다.
릴리
으음. 토끼 씨가 그러는데 우리는 명성보다 급한 게 있대.
당장 다음 달 임대료부터 걱정해야 한다는데?
그웬
어쩔 수 없잖아! 가출한 고양이 찾기 같은 간단한 사건도 요즘은 구원단들이랑 경쟁하는 시대라고!
어디 구원단도, 타운가드나 치안국도 눈독 들이지 않는 사건 없나…
릴리! 내가 자리 비운 사이 따로 들어온 의뢰 같은 거 없어?
릴리
으응, 그게 두 건 정도 있긴 한데...
하나는 우리 쪽으로 온 게 맞지만, 봉투 안이 비어 있어.
아마 누군가의 장난 아닐까?
그웬
뭐야! 그럼, 그거 말고 다른 건은?
릴리
다른 건으로는 베이커가 탐정 사무소 앞으로 온 게 있어.
그웬
쳇! 이젠 람파디스 수사 컨설팅이라고!
아직도 다들 여기가 베이커가 탐정 사무소인 줄 알잖아!
프로페서M
어쩔 수 없죠. 그 이름으로 바꾼 지는 얼마 안 됐으니까.
교수는 빈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웬
끙… 그래서 무슨 의뢰인데?
릴리
유서 깊은 마도 가문의 전대 가주 사망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야.
그웬
뭣?! 진짜?
릴리
응…
그웬
그럼 다들 뭘 한가하게 차나 마시고 있는 거야!
치안국이나 다른 탐정들이 가로채기 전에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야지!
릴리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우리에게 온 의뢰인걸.
의뢰자가 바스커빌 가문의 신임 가주 헨리 바스커빌이니까.
그웬
바스커빌?!
릴리
그래. NOA 구시가지에 있는 그 으스스한 저택.
그웬
맞아. 그 소문으로만 듣던 음산한 저택…!
릴리
그곳의 주인 바스커빌은 지금도 모두가 두려워하는 이름이야.
그웬
바스커빌…
릴리
그런데 그 바스커빌 가주의 의문사를 조사해 달라니?
분명 가문의 어둠과 깊이 얽혀 있는 추악한 음모일 거야.
그웬
바스커빌이란 말이지…
릴리
맞아. 라비스타의 어둠과 뒷세계를 상징하는 그 이름. 바스커-!
그웬
아, 조용히 좀 해봐! 릴리! 자꾸 옆에서 쫑알쫑알 떠드니까 머릿속에서 생각이 안 나잖아!
바스커빌… 분명 치안국 시절 들어봤는데. 가수였나?
릴리
…!
릴리의 눈썹이 지그재그로 경련한다.
그녀의 손에 들린 토끼 인형이 부르르 떨린다.
그리고…
그웬
우왁! 그만둬! 릴리! 이건 하극상이야!
사장을 주인님 스테이크 훔쳐 먹은 강아지마냥 패다니!
너 해고당하고 싶어?!
릴리
나, 난 때리고 싶지 않은데! 토끼 씨가 지금 화내고 있단 말이야!
아니, 나도 사실 사장님이 오늘은 좀 맞아야 하는 것 같아!
그웬
우아악!! 그만둬! 인형인데 왜 이리 아파!
경쾌하게 팡팡 터지는 타격음과 그웬의 비명.
그 아수라장 뒤로 교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색 봉투를 집어 들었다.
프로페서M
그웬 양이 모를 만도 해요. 라비스타에 유서 깊은 귀족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영지를 가지고 의무를 지며 빛 아래 활동하는 스트라니스나 오를랑 같은 명가.
반대로 빛이 닿지 않는 뒷세계를 지배하는 마도 명가가 있죠.
서로 힘 차이가 명확하다 보니 마도 명가는 그림자 속에 숨어 지냈죠.
다른 귀족들도 얌전히 있는 그들을 굳이 건드리지 않는 관계가 쭉 이어졌습니다.
교수는 송곳니 모양의 인장을 쓰다듬었다.
프로페서M
그리고 그 관례를 최초로 깬 것이 바스커빌이었죠.
초대 가주 휴고 바스커빌이 만들어 낸 합성수 바스커빌의 개.
그 괴물은 NOA를 초토화할 뻔했습니다.
그런 바스커빌이 이제 와 빛 아래로 나와 가주의 의문사를 밝혀 달라며 탐정을 찾고 있다니.
뭐…… 겉으로만 보면 흔한 의문사 조사에 불과합니다만.
그웬
교수님.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뭔가 아는 눈친데?
죽었다는 가주가 아는 사람이야?
프로페서M
글쎄요.
오래된 가문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따라붙기 마련이니까요.
그웬
뭐야, 그게.
릴리
난 반대야 사장님. 다른 유명한 탐정 사무소도 많잖아?
굳이 무명에 파리 날리는 우리에게 의뢰한 것이 수상해!
프로페서M
날카로운 판단입니다. 릴리 양.
실제로 의뢰 내용만 놓고 보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만한 사건인지도 의문이고요.
그웬
그래도 난 가야 한다고 생각해.
릴리
사장님?
그웬
위험해 보인다… 불길하다… 저주받았다…
모두 도전할 만한 사건들에 흔히 붙는 표현이잖아?
릴리
사장님 모험 좋아하지… 깜빡했어.
그웬
그리고 말이야 릴리. 모든 사건에는 피해자가 있어.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가 어떤 이유로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다면…
명탐정이 사라진 이 거리에서 우리 람파디스 수사 컨설팅 아니면 누가 돕겠어?
릴리
…정말, 그런 말까지 들으면 반대하기 어렵잖아.
프로페서M
그럼, 이야기는 정해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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