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SPR

회색빛 연구 · 챕터 10

안개 낀 황야에서

바스커빌 연구소장이 어린아이를 괴물로 만들려고 하다 들켜 도주했다.

이 충격적인 사실에도 헨리는 연구소를 빠르게 장악했다.

헨리

연구소의 여러분.

잭 소장은 바스커빌의 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일에 가담, 혹은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두려워서 침묵했습니다.

백부님에게 물려받은 가문이 지금 지위를 잃을까 두려웠습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걸 잃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를 고통받게 내버려 뒀습니다.

가주로서 제가 가장 큰 죄인이며 지금 가주의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헨리가 고개를 숙이자 몇몇 연구원들이 걸어 나와 헨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스커빌 연구원

저희도 소장님에게 협박당해서 억지로 돕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제 죄를 씻겠습니다.

헨리

상황이 급박하니 이제 와 잘잘못을 논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죄를 끊어 냅시다!

연구소 직원들에게 연설을 마치고 온 헨리에게 교수는 느릿느릿 짧게 박수를 쳤고 그웬은 가볍게 격려했다.

헨리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할 일입니다.

공방의 인형들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추격은 여러분들과 제 인형들이 맡기로 하죠.

사람이 많다고 해서 저 안개 지대에서 효율이 높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웬

응. 알겠어. 우리도 빨리 출발할 수 있는 게 좋으니까.

헨리

출발하겠습니다.

인형들이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묘한 자세로 안개 지대를 돌아다니고 있다.

인형의 무리 한가운데에는 헨리와 람파디스 수사 컨설팅 인원들이 천천히 이동 중이다.

헨리

전초와 수색은 제 인형들이 맡겠습니다.

탐정 사무소의 여러분은 체력을 온존해 주십시오.

그웬

그래서 레이첼을 찾을 수 있을까?

헨리

이 인형들은 바스커빌의 생체 장기를 이식한 인형들입니다.

안개 속에서도 수색할 수 있도록 열을 감지하는 눈을 장착했죠.

그런 특수 처리를 하느라 전투력은 다소 떨어집니다만…

헨리가 말끝을 흐리자 그웬이 자신의 가슴을 팡 두드렸다.

그웬

그건 우리에게 맡겨.

헨리

역시 든든하군요.

수색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들은 안개 속에서도 잭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웬

인형 부품, 약병들. 그리고 빈 주사기…

릴리

새것과 오래전에 떨어진 것들이 섞여 있어.

헨리

아무래도 잭 소장은 꽤 예전부터 이곳에 들락거렸나 봅니다. 계속 추격하시죠.

일행은 인형들이 드문드문 발견하는 흔적을 따라 추격을 이어갔다.

하지만 첫날은 소득 없이 지나갔다.

헨리

숙녀분들을 노숙하게 만들어서 죄송하군요.

그웬

괜찮아. 잠복 수사는 원래 노숙이 일상이야.

릴리

헨리 씨는 어쩌실 건가요?

헨리

저는 휴식을 취할 거지만 인형들은 계속 잭 소장을 찾을 겁니다.

동력만 공급되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잠을 잘 필요도 없으니까요.

릴리

자동 인형의 진짜 장점은 이런 수색이나 인명 구조일지도 모르겠어요.

프로페서M

후훗. 릴리 양 같은 생각을 해본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간호사를 대체하는 인형, 요리사를 대체하는 인형 등 여러 인형이 시도되었죠.

그웬

그런데 내가 아는 자동 인형은 전부 전투 인형들뿐인데?

프로페서M

전투 외의 인형 기술은 다 답보 상태거든요.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인간을 효율적으로 살상할 수 있는 쪽으로만 발전하네요.

교수의 시니컬한 말에 릴리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프로페서M

하지만 바스커빌의 기술이 더해진 인형은 충분히 강점이 있죠.

열을 보는 눈으로 대상을 쫓는 수색 인형은 인형의 도시 파렌에서도 볼 수 없을 겁니다.

헨리

과찬이십니다. 이것도 백부님의 업적이죠.

프로페서M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도 바스커빌의 개까지 재현하고 싶었던 걸까요.

헨리

아… 잭 소장 이야기였군요. 네. 확실히 그도 뛰어난 마도학자였죠.

지금처럼 생체 부품을 인형에 갈아 끼우는 기술도 그가 개발했고요.

헨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헨리

저는 삼류지만 마도학자 나부랭이라 그 욕망과 집착을 이해합니다.

다른 마도학자들은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해냈다.

이런 전능감은 신이 된 기분을 체험하는 것이죠.

프로페서M

신이라… 한번 그 기분을 맛보면 다시는 돌아가기 힘들겠네요.

헨리 씨는 그 기분을 맛보신 적이 있나요?

헨리

저는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없어서 다행입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그 전능감을 맛봤다면 영원히 평범한 행복은 못 느낄 것 같거든요.

프로페서M

휴고 바스커빌처럼 말이죠.

헨리

…아, 네. 그렇죠. 그런 최악의 선례가 있었죠.

죄송합니다. 잭 소장에게 쌓인 게 저도 많아서요.

그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흥분했나 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명탐정 H. 그분이 계셨다면 당연히 그분에게 의뢰를 했겠지만요.

프로페서M

저희로서는 다행이네요. 돌고 돌아 저희에게 기회가 왔으니.

헨리

그런 비교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기대 이상… 아니 단언합니다.

명탐정 H가 직접 왔어도 이렇게 일이 풀리진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그웬

후훗. 도련님.

헨리

예!

그웬

그건 아니지.

릴리

사장님 명탐정 H에 관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잘되는 편이구나.

헨리

하하. 들리는 소문대로의 그분이라면 더 빨리 잭 소장의 음모를 밝혀내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저에게 죄를 씻을 기회까지 줬을지는 모르겠거든요.

덕분에 이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든…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무엘 바스커빌의 최후를 아시나 보군요.

릴리

네.

헨리

그 사실이 제 결심을 망설이게 만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괜찮을 것 같군요. 그분은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고의 탐정 3인방이 함께지 않습니까.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릴리가 짧게 신음했다.

갑자기 어색해진 공기에 그웬이 두리번거릴 때 헨리의 인형들 중 하나가 비척거리며 걸어왔다.

팔에는 각종 음식과 술 한 병이 든 피크닉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헨리

급히 출발하느라 많이 챙기진 못 했습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저 너머에 불을 피우고 있겠습니다.

그웬

도련님 좋은 사람이네!

릴리

응…

그웬은 바구니에서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교수는 술병을 꺼냈다.

오직 릴리만이 아무 음식도 집어 들지 않고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다.

프로페서M

그럼 바스커빌 가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한잔하실 분?

그웬

난 됐어…

릴리

저도요.

프로페서M

후후. 두 분은 매번 거절하시는군요. 좋아요.

저도 이 아까운 걸 나누긴 싫거든요.

교수는 그대로 우아하게 병을 입에 갖다 댔다.

교수가 술을 들이켜는 동안에도 릴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빵을 우물거리던 그웬은 릴리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그웬

릴리, 아까부터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릴리

사장님. 사무엘 바스커빌은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아?

그웬

용기 있는 사람 아닐까? 지금의 헨리 도련님처럼.

릴리

응. 사무엘 바스커빌은 휴고 바스커빌 토벌에도 앞장섰어.

그리고 그 이후에는 휴고에게 찬성했던 친지들을 자기 손으로 처형하는 일까지 맡아야 했어.

그중에 그의 아버지가 있었던 건 당연하고.

충격적인 사실에 그웬은 들고 있던 빵 덩어리를 떨어뜨렸다.

그웬

그건 너무 가혹한데…

릴리

그러고도 진정성을 의심받아서 고문에 가까운 조사를 받고 폐인이 되어 돌아왔지.

그리고 바스커빌 가문에서도 배신자 취급을 받았어.

그래서 결국…

프로페서M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굶어 죽다시피 죽었습니다.

술병에서 입을 뗀 교수가 속삭이듯 말했다.

프로페서M

그 죽음은 누구도 애도하지 않았고요.

릴리

헨리 씨… 각오했다고 했어. 이 이후에 있을 모든 일들을…

사장님은… 나보다 강하니까 후회하지 않고 몇 번이고 레이첼을 구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헨리 씨를 보면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 혼란스러워.

그웬

그걸 알았으면 나도 좀 더 고민했지…!

도련님은 좋은 사람 같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릴리. 너무 괴로워하지 마.

무엇보다 그 도련님이 스스로 결정한 거잖아. 그 사람도 각오한 거야.

릴리

…희생을 결심한 걸 지켜보는 건 이제 싫은데.

릴리는 누군가가 생각난 듯 가만히 불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둘을 바라보고 있던 교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프로페서M

후후. 그웬 양, 릴리 양은 둘 다 감정에 솔직해서 좋네요.

그웬

뭐야, 갑자기 교수님.

프로페서M

후후. 그런 모습들을 보면 저는 기대가 됩니다.

감정, 마음, 희망. 그런 것들이 제게 어떤 걸 보여줄지.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다치게 된다면, 저는 너무 슬플 것 같거든요.

릴리

…안 어울리게, 갑자기 왜 그러세요?

프로페서M

후후. 그랬나요?

아무튼 이번 건, 우리 끝까지 함께 잘 마무리해보도록 하죠.

스토리 및 일러스트 © Studio B-Side. 비공식 열람용 아카이브입니다 — 문의나 요청은 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