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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R

모놀로그는 끝나야한다 · 챕터 2

조우

스토리 일러스트

강렬한 빛이 흩어진 뒤, 눈을 떴을 때는 잿빛의 황무지였다.

모든 것이 하얗게 불타 버려서, 눈발처럼 휘날리는.

아세라

여기가… [파국의 가능성]이 실현된 세상…

나:

확실히 파국이라고 할 만하네…

오메가

으퉷퉤퉤! 오메가 먼지 먹었어! 입에 막 들어와!

아세라

공기가 너무 뜨거워서 목 안쪽이 욱신거릴 정도야.

꼭 연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이야.

단장은 어때? 괜찮아?

나:

죽겠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야 세상이 이렇게 되는 걸까…?

국가 규모의 산불? 화산 폭발? 아니면 공허의 별이 승리한 세상?

이런 저런 상상이 떠올랐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런 세상을 만들 [가능성]이, 라비스타에 영향을 끼치게 놔둘 수는 없다.

아세라

자, 손수건이야. 두 사람한테 빌려 줄게.

오메가

응, 고맙습니다! 언니!

아세라

아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럼 이제 [침식핵]인지 하는 걸 해치우러 가자.

나:

잠깐 정지.

아세라

어? 무슨 일 있어, 단장?

나:

뭐가 침식핵인지 모르잖아, 우리는.

지금은 상황 파악이 먼저야.

아세라

아차… 생각해 보니 그렇네.

그럼 어떡하지?

나:

파국에 저항한다는 사람들을 찾아 보자.

알리시아의 조언대로.

아세라

아하…!

맞아, 그 사람들이면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좋아! 그럼 어서 출발하자!

나: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네…

오메가

으으, 앞에 아무것도 안 보여…

오빠, 정말 이런 데에 사람이 살고 있을까?

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오메가

우으…

저기 봐! 먼지 구름이야!

아세라

어라? 정말이네?

사람일지도 몰라! 내가 가서 확인하고 올게!

나:

아세라, 잠깐!

걱정이 무색하게, 아세라는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오메가

오오…! 아세라 언니, 정말 빨라!

오빠, 오메가도 열심히 훈련하면 언니만큼 빨라질 수 있을까?

나:

물론이고 말고.

그 대신 편식하면 안 돼.

오메가

에엣, 그러면 오메가는 그냥 느리게 살래!

저기 봐, 오빠. 언니가 돌아오고 있어.

나:

벌써 확인한 건가?

그런데 표정이 어째…

오메가

공허체들이야!

나:

어째서 여기에 공허체가?!

오메가

언니를 쫓아오고 있어! 숫자도 엄청 많아!

나:

일단 우리도 뛰자!

누가 이기나 승부야!

오메가

앗! 그럼 오메가가 1등 할래!

아세라

하아, 하아, 하아…!

잠깐 보려던 게 그만 들켜 버렸어! 미안해, 단장!

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저 녀석들한테서 도망쳐야 돼!

아세라

이런 황무지에서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는 없잖아!

나 혼자라면 힘들어도, 우리 셋이서 싸우면 이길 수 있어!

아세라의 말을 듣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

나:

아니, 무리다! 절대로 무리!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아!

아세라

하지만…!

…뭐, 뭐야? 방금 그 소리는?

오메가

빵야 소리야! 근데 빔을 쏘는 게 아니야!

저쪽에서 들렸어!

포니테일 소녀

너희들! 어서 이쪽으로 와!

아세라

으왓?!

굉장한 위력이네…? 저렇게 큰 총은 스마일 말고 처음 봐…!

나:

감탄은 나중에!

일단 저 애 말대로 하자!

아세라

으윽…! 알겠어, 단장!

소녀와 가까워지자, 잿더미 아래에 지하로 내려가는 동굴 입구 같은 것이 보였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소녀는 벽에 달린 레버를 내렸고…

두터운 강철 격벽이 내려와 몰려드는 공허체들을 가로막았다.

포니테일 소녀

됐어. 조금 지나면 조용해질 거야.

나:

저 녀석들, 격벽은 못 뚫는 건가…

포니테일 소녀

그래. 덩치가 큰 녀석이 끼어 있으면 몰라도.

아세라

사, 살았다…

오메가

우으, 동시에 들어왔어… 이번에는 1등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고 봐, 언니! 다음에는 오메가가 꼭 이길게!

아세라

이런 달리기 경주라면 두 번 다시 하기 싫어…

아.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포니테일 소녀

너무 고마워하지 마.

너희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도와 준 것뿐이니까.

아세라

으, 응?

아하하, 괜찮아. 어쨌거나 도움은 받았잖아.

난 아세라라고 해. 네 이름은 뭐야?

유미나

…유미나.

아세라

헤에, 미나구나. 예쁜 이름이네.

유미나

별로.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

나:

묻고 싶다는 게 어떤 거야?

우리가 아는 거라면 얼마든지 말해 줄게.

유미나

그래? 그럼 어떻게 여기 왔는지 설명해 봐.

아세라

그거라면 간단하지.

우린 알리시아님이 만들어 준 포탈로 왔어.

유미나

알리시아?

…누군데, 그 사람이? 과학자나 관리국 사람이야?

아세라

알리시아님을 모른다고?

단장이랑 똑같네.

알리시아님은 [별의 구원자]와 함께 싸웠던 대마녀야.

그러니까… 라비스타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유미나

별의 구원자? 대마녀…? 라비스타는 또 뭐야?

…유미나에게 라비스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줬다.

유미나

그러니까… 다른 세상에서 왔단 말이지?

아세라

맞아. [침식핵]이란 존재를 무찌르러.

그런데 미나 너는… 원래 여기서 살았어?

유미나

아니. [이면세계]에 사람 같은 건 살지 않아.

아세라

이면세계…?

유미나

그래.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우리가 사는 현실과는 또 다른 세상.

뭐, 지금 바깥은 그 [이면세계]도 아니게 됐지만.

아세라

이면세계라니, 모르는 이름이네…

우리는 여기를 [파국의 가능성]이 실현된 세계선이라고 들었거든.

나:

이면세계도 아니게 됐다는 게 무슨 뜻이야?

유미나

말 그대로야. 원래부터 황폐하긴 해도 저렇게 재만 날리는 풍경이 아니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 말처럼 [파국의 가능성]이 실현된 곳일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너희들이 여기 왔다는 건, 돌아갈 방법도 알고 있다는 거겠지?

아세라

응? 돌아갈 방법?

유미나

우린 현실세계에서 어떤 녀석들을 쫓아왔는데…

녀석들과 싸우던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 돌아갈 방법이 사라졌어.

그러니까 너희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세계로 돌아가게 해 줘.

너희한테도 원래 살던 데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 거잖아.

아세라

그러고 보니…

오메가. 혹시 돌아가는 방법 알아?

오메가

그게, 오메가도 데이터베이스를 막 뒤져봤는데…

[이차원에서 살아남기]책이 닫혀 있어. 글자도 와장창 깨져서 못 읽어

아세라

…단장은?

나:

아차차…

아세라

크, 큰일이야! 이제 어쩌지?!

유미나

…역시 수상해, 너희들.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왔다는 게 말이나 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쏴 버릴 줄 알아.

아세라

자, 잠깐! 갑자기 총을 겨누면 위험하잖아!

아무리 도와 줬더라도 그런 식으로 위협하면 가만 안 있을 테니까!

오메가

친구를 괴롭히는 건 고장난 친구들이 하는 짓이야!

유미나

난 너희들이랑 친구 놀이 할 생각 없어.

…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어.

이 이면세계에… 우리 말고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

솔직히 말해. 너희들, [마왕]과 한 패지?

아세라

마, 마왕이라니…?

오메가

아니야. 오메가랑 언니 오빠들은 [마왕] 같은 사람 몰라.

나:

정말이야.

유미나

시치미 떼겠다는 거야?

좋아, 어디 마음대로 해. 그럼 이쪽에서도…

백발의 소녀

그만하면 됐다, 신입.

그렇게 의심할 필요는 없어.

이 녀석들이 놈의 사도나 권속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으니까.

유미나

하지만 소대장, 이 녀석들 말도 안 되는 핑계만 늘어 놓잖아.

다른 세계에서 왔다느니, 어쨌다느니…

백발의 소녀

다른 세계라고?

아세라

잠깐, 우린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 줬다구! 핑계가 아냐!

오메가

아세라 언니 말이 맞아! 너무해!

소대장이라고 불린 소녀가, 갑자기 오메가를 빤히 바라봤다.

나:

저희 오메가한테 무슨 용무라도?

백발의 소녀

…그렇군. 오메가라고 부르는 건가.

아무래도 그 망할 녀석이 준비해 놓은 포석인가 보군.

유미나

소대장, 갑자기 왜 그래?

백발의 소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간혹 존재한다, 신입.

우리 현실과 다른 세계에서 넘어 오는 녀석들이.

유미나

뭐? 정말이야?

백발의 소녀

그래. 하지만 이 녀석들은…

내가 아는 경우와도 조금 다른 것 같군.

유미나

…알겠어. 소대장이 그렇다면.

주변을 살펴보고 올게.

그 이상한 괴물들이 아직 근처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메가

가 버렸어…

아세라

그러게…

하지만… 정말 쏠 생각이었던 걸까…?

백발의 소녀

미안하다. 우리 신입이 놀라게 했군.

힐데

코핀 컴퍼니 제 1 소대, [펜릴 소대] 소대장 힐데다.

나:

보이저 구원단의 단장이야.

고마워. 싸움을 막아 줘서.

힐데

…녀석에 대해서라면 신경 쓰지 마라.

경험이 없어서 이런 상황에 마음을 다잡지 못할 뿐이니까.

그보다, 아까 너희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파국의 가능성]을 막으러 왔다고?

오메가

응! 잘은 모르지만 고장난 친구가 있대. 엄청 세게 때려야 나을까말까래.

그래서 오메가랑 언니들이 최대 출력으로 고쳐주러 왔어!

힐데

묘한 주문이로군.

하지만…

나:

짚이는 사람이 있어?

혹시, 유미나가 말했던 [마왕]?

힐데

…짚이는 상대가 있다면 그 녀석이겠지.

하지만 덤빌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너희만으로는 불가능해.

아세라

불가능하다니…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마왕]이 강해?

힐데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성가신 편이다.

이 곳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있겠지?

나:

온통 잿더미였어.

전부 불타 버린 것처럼.

힐데

그래. 세상 하나를 불살라 버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녀석…

아스모데우스에게는.

스토리 및 일러스트 © Studio B-Side. 비공식 열람용 아카이브입니다 — 문의나 요청은 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