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궤적에 물들어가는 신년의 밤! · 챕터 8
시간을 넘어 이어져 가는 것

아세라
단장, 조심해!
이 녀석들, 어쩐지 아까부터 단장만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으니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균열에서 생성되는 공허체들은, 이상하리만큼 집요하게 나를 공략하려 들었다.
아세라
단장, 이제부터 내가 선두에 설게. 단장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눈동자의 시선이 아세라에게 꽂혔다.
채 반응할 틈도 없이, 강렬한 빛이 아세라에게 쏘아졌다.
아세라…!
에핀델
아슬아슬했네요.
아세라
에핀델…!
에핀델
뭘 그리 놀란 표정이신가요?
참…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늘 그랬다니까요.
완벽한듯 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다보면 꼭 한군데씩 칠칠치 못하게 약점을 드러내곤 했죠.
연약한 맨살과 날카로운 발톱은 숨길수록 좋다.
오를랑 가문의 오랜 교훈을 여러 번 알려드렸을텐데요.
에핀델…!
와 줬구나!
아세라
너… 여기 와도 괜찮은거야? 네 입장이-
에핀델
그만. 더 말할 필요 없어요. 제 입장은 스트라니스 영애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세라
그런데 왜-
에핀델
…글쎄요. 그냥, 제가 이러고 싶었다는 걸로 해두죠.
겸사겸사… 이렇게 하면 영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려나 싶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충동적으로 굴어보려구요.
그러니까, 절 후회하도록 만들지 마세요.
아세라
…
…후후, 아하하!
에핀델
뭐, 뭐가 웃기죠?
아세라
아냐, 역시 에핀델은… 내가 기억하던 옛날의 에핀델이구나 싶어서.
에핀델
그, 그런 얘기보다, 어떻게 하면 저 균열을 닫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먼저예요!
저 괴물. 이 유물 안에 봉인되어 있던 녀석이라고 했죠?
그리고 보아하니, 아직 완전히 균열에서 나온 건 아니군요.
아세라
아마, 로베르타가 방해한 덕분이겠지.
에핀델
봉인되어 있었던거라면 봉인을 유지하던 힘이, 아직 이 유물에 남아 있을 터.
그 힘을 이용하면 다시 봉인할 수 있을거예요.
흣…?!
균열이 금방이라도 찢어져 나갈 듯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팽창된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빛의 포화를 날려대기 시작했다.
아세라 & 에핀델
크읏!
에핀델, 그거 나한테 줘!
에핀델
단장님…?!
분명 유물의 작동 트리거는 나와의 접촉이었다.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일거라고 생각하며 에핀델에게 손을 뻗은 순간-
아세라
아, 안돼…!
시야가 기울어진다.
아세라
단장, 안돼-!
에핀델
단장님이…! 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갔어…!
내, 내가… 조금만 더 빠르게 대응했더라면…
이래서야…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아세라
아냐, 아직 안 끝났어.
아직 유물은 우리 손 안에 있어. 그리고…
저 괴물이 찾고 있는건 유물이야.
저것 봐. 아까랑 다르게 반응이 격렬하지 않잖아.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놈은 착각한 거야.
에핀델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요?
아세라
당연히 역공이지.
에핀델, 나 좀 던져줘. 저 균열까지 닿을 수 있도록.
에핀델
뭐, 뭐라구요?
아세라
유물로 녀석을 유인할 거야. 봉인을 풀 수 있을 거라 기대하도록 말이야!
그 사이에 단장을 깨운 뒤, 타이밍을 노려서 균열 안에서 힘을 역류시키는 거지.
알겠지? 준비되면-
에핀델
하?! 무슨 소리예요! 그런 무모한 걸 지금 계획이라고 짠 거예요?
삐끗하면 그냥 봉인을 풀도록 도와주는 게 된다고요!
아세라
도와주지 않겠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어.
에핀델
아세라, 잠깐!
그 방법이 확실한지도 모르잖아!
아세라
응, 나도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 말고 다른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에핀델
아세라…!
아세라
괜찮아, 에핀델. 나, 반드시 해낼 테니까.
그러려면 역시 네 도움이 필요해. 혼자서는 저 간격으로 파고들 자신이 없어.
에핀델
으극…!
아세라
옛날에 많이 해봤잖아? 우리집 뒷마당에서 나무 오를 때 도와주던 거랑 비슷할거야.
그때 기억, 잊어버린건 아니지?
에핀델
그거랑 이거랑 같아?!
아세라
일단 해보고 생각하자! 자, 난 준비됐어!
에핀델
아세라 너란 인간은 진짜…!
실패하면 가만 안 둘 테니까!
아세라
간다앗…!
니가 원하던 게 이거지?
빌려줄테니까, 단장을 돌려줘…!

눈을 뜬 곳은, 어둠이 막 내려앉은 숲 속.
여긴 어디지? 확실한 건 NOA는 아니다.
분명 마지막 기억은 단장을 구하기 위해, 에핀델의 도움을 받아서...
균열을 향해 유물을 든 채로 뛰어들었고…
...이상한 일이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으읏…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이 조금 가라앉자, 멀리서 바람결을 타고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억센 수풀을 해치고 잠시 걷자, 너른 공터 하나가 나타났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한 무리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저기요…?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지만, 저들끼리 웃고 떠들 뿐 돌아보는 이가 없다.
낯선이의 방문이 못마땅해 일부러 무시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저 목소리가 작았을 뿐일까.
조금 더 다가가 말을 걸려고 한 순간, 무리 중 한 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그 얼굴은 익숙한 누군가와 닮아 있다.

단장…?
하지만… 역시 조금 다를지도.
단장의 얼굴은 저렇게…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죠?
단장을 닮은 남자를 향해 다시 한번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이쪽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활기찬 목소리
자아-! 신년 기념 파티다, 인간 녀석들아-!
특별히 이 몸이 신경 써서 구운 고기니까 맛있게들 먹으라고!
차가운 목소리
…겨우 고기 몇 점 구워먹는 걸로 신년 파티는 무슨.
그래봤자 내일이면 또 빌어먹을 공허체들이 들러붙어올 게 뻔한데.
따뜻한 목소리
■■, 그래도 오랜만의 여유잖아? 웃고 떠들 수 있을 때 해두는 편이 낫지 않겠어?
활기찬 목소리
그래 맞다! 그렇게 입만 삐쭉거린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느냐!
조용한 목소리
그나저나 벌써 신년이라니... 시간이 빨리도 지나가는 걸요.
따뜻한 목소리
그런데… ■■은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어제 싸울 때 어딘가 다쳤다든가?
차가운 목소리
이 녀석, 어쩐지 요즘 이상하다니까.
저번엔 승천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질 않나. 머리라도 다친 거야?
따뜻한 목소리
승천…? 하늘로 올라간다고?
■■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활기찬 목소리
그래! 정말 오래간만에 또 이상한 소릴 해대는구나 싶었다!
차가운 목소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안 하게 되었다 싶었더니만…
이제는 하늘로 가고 싶다는 거냐. 우와.
■■
하하, 아냐. 그냥 별 생각없이 했던 얘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 하늘로 올라가겠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조용한 목소리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말도 했었죠?
원래 살던 곳에서는 하늘 위로 높이 올라가서 우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고…
로켓이라고 했었나요?
■■
…응, 뭐.
따뜻한 목소리
…그럼 말 나온 김에 우리도 한번 만들어서 쏴 볼까?
진짜 ■■ 말처럼 저어기 별까지 날아갈 수 있는지, 궁금한데?
차가운 목소리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활기찬 목소리
오오 과연...! 재미있겠는걸? 좋은 아이디어다! 당장 하자꾸나!
이녀석 손재주라면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조용한 목소리
흉내만 내는 정도라면… 만들 수 있을지도요.
따뜻한 목소리
응. 어때 ■■?
■■
그래, 그러자.
활기찬 목소리
네 고향까지 닿을만한 걸 쏴 올려 줄 테니 기대하거라! 흐하핫!
■■
…신경 써줘서 고마워, ■■■■.
활기찬 목소리
간만에 고향 생각이라도 났느냐?
요새, 어두운 얼굴로 공책에 뭔가를 끄적거리기만 하지 않느냐?
그 일기인가 뭔가를 쓰는 거냐?
■■
…아, 이거?
단장을 닮은 그 사람은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저건…?
낯익은 공책이다.
남자가 천천히 그 공책을 들고 손을 뻗는다.
■■
비슷한 거야.
나중을 위해서… 뭐라도 준비해 두는게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저것 해 보고 있는 건데, 어떨지 모르겠네.
남자는 공책에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여보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무언가 입을 달싹거리는 것만 보일 뿐.
조금 더 다가간 순간.

남자가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목소리
이봐, ■■. 어딜 그렇게 보는거야?
따뜻한 목소리
거기 누구 있어?
■■
…
미안해. 지금은 이렇게 붙잡아 두는게 최선인 것 같네.
더 좋은 방법을 모색중이니… 이 녀석은 너희들에게 맡길게.
내 기억과-…
의지를… 이곳에-
시야가 흐려지고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고 느낀 순간.
유물이 밝게 빛났다.
스토리 및 일러스트 © Studio B-Side. 비공식 열람용 아카이브입니다 — 문의나 요청은 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