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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R

바람, 달, 그리고 검 · 챕터 11

바람은 불고 달은 비춘다

두 사람이 격돌하는 순간, 바람이 몰아쳤다.

달빛 아래에 존재하는 건 둘 뿐.

검에서 반사된 달빛이 두 사람의 주변을 에워싼다.

페이

무겁군. 그리고 빠르다!

옛날보다 훨씬 강해졌구나, 린! 기쁘다!

린

여유가 있으시군요.

그렇다면…

페이

응?!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페이가 튕겨 나왔다.

페이

…변칙적이군. 반응하지 못할 뻔했어.

살기가 가득하구나, 린. 공기까지 베어낼 만큼 예리해.

린

말씀드렸을 텐데요.

생사불문, 당신을 당주님 앞으로 끌고가는 것.

그것이 백월이 받은 지령입니다.

나:

……

검에 손을 얹은 순간.

페이

끼어들지 마라!

지켜봐라, 단장. 내가 이긴다. 약속하지.

거기서 지켜봐라.

페이가 다시 달려 나가고, 또 한 번 둘의 검이 부딪쳤다.

페이

왜 그러지, 린! 이상하군!

린

…뭐가 말이죠?

페이

처음보다 검이 가벼워졌다.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나?

린

…!

당주

최근 너의 검을 보았다. 검끝이 흔들리더구나.

머리에 잡념이 가득하다는 증거.

린

…참견하지 마시죠.

페이

그렇게까지 내가 싫었나?

7살 때 내가 간식을 뺏어 먹어서 그런가? 9살 때 꿀밤을 때려서 그런가?

린

…화조풍월의 구성원들은 감정보다 명령을 우선합니다.

당주님의 지령에 따라 당신을 배제할 뿐입니다, 페이.

페이

아니면 그거군.

말없이 떠난 나를 지금까지 원망하고 있었겠지.

린

……!

린

당주님, 페이 사저를 파문하신 게 진짜인가요?!

당주

소란 피우지 말거라, 린. 사실이다.

린

분명… 분명 오해가 있을 거예요! 페이 사저가 그럴 리 없어요!

당주님, 페이 사저의 파문을 취소해 주세요. 제발!

당주

이미 결정된 일이다. 철회할 생각은 없느니라.

린

당주님!

당주

만약 오해라면 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느냐?

린

그건…!

당주

페이와는 네가 가장 막역한 사이였지.

작별 인사는 나눴느냐?

린

……

당주

…너한테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떠나갔느냐?

야박한 녀석인지고…

페이

린, 너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지.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너에게 말하면 따라오겠다고 할까 봐…

린이 페이의 몸 안쪽을 파고들자,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페이가 튕겨 나왔다.

나:

페이! 괜찮아?!

페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막았지만…

쿨럭!

…완벽히 흘려내지는 못했군.

린

천문서…

페이

음?

린

……

말하지 않으면 마음은 전해지지 않아.

린

말하지 않으면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린

그딴 게 그리도 중요하셨나요?

페이

……

린

어린 시절을 함께 해온 당주님, 동문사제…!

그리고 나!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나를 미련 없이 떠날 만큼…! 나보다!

천문이 그리도 중요했나요…? 네…?!

페이

린, 나는…

린

풍월검법 제7식!

린이 자세를 잡자, 린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들었다.

린

…청풍명월

지금 제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초입니다.

페이

…무인은 검으로 말하는 법인가.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페이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린

…뭐하시죠, 지금? 장난하시는 건가요?

페이

내 절초는 이 자세에서 시작된다.

뭐하고 있지? 와라, 린.

생사불문, 당주님 앞으로 끌고 가겠다고 하지 않았나?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나! 와라!

린

……읏!

린의 검이 번쩍이자 바람이 멈췄다. 주변이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소리마저 베인 듯한 무음의 공간 속.

그리고 그 중심에서…

페이

천문검법 제0식

청풍랑월

보랏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스토리 일러스트

거센 모래바람이 지나간 후에 두 발로 서있는 사람은 페이뿐이었다.

페이

…강했다, 린. 간발의 차이였어.

네 마음에 잡념이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 쓰러져 있는 건…

린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페이

무리하지 마라.

청풍명월은 광풍제월보다 부담이 큰 기술.

아무리 너라 해도 멀쩡하지는 못할 텐데?

린

…해요.

페이

…뭐라고?

린

분해요…!

페이

분하다고…? 린, 변했구나.

너는 승패에 집착하던 성격이 아니었을 텐데? 아니었나?

린

…흑.

페이

…린?

린

흑… 흐윽!

이겨서… 당신을 데려가서…

페이

…

린

무의 길 따위…! 천문 같은 건 전혀 쓸모 없었다고!

중요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고 싶었는데… 흑…!

페이

…

린

…흑. 윽…!

왜 저를 두고 떠나셨어요, 페이 사저…!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약간의 침묵 후에 입을 뗀 사람은 페이였다.

페이

…천문을 완성시키려면 천문서가 필요했다.

그때 내가 내린 결정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

린

……

페이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해도…

풍월당에서 당주님, 동문사제, 세르팡, 토토.

그리고 린.

모두와 함께 보냈던 따뜻한 나날들을, 나는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

린

…흑!

페이

말없이 떠나가서 미안하다, 린.

린

……

나:

린…?!

페이

체력이 다해 쓰러진 것뿐이다. 안심해라.

…응?

복잡한 표정이군. 왜 그러지?

…당주님의 생각을 모르겠다고?

나:

둘이 자매처럼 지냈다고 들었어.

나:

그런데 왜 둘을 싸우게 한 걸까…?

페이

하핫! 그렇군. 당주님이 매정해 보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나는 알 것 같다.

린의 검이 흔들리는 걸 본 후 잡념을 떨쳐내라고 나와 맞붙인 거겠지.

오랜만에 동문사제들끼리 얼굴도 보게 하고 말이지.

철두철미하신 분이다.

나: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페이

하핫! 믿기 힘들겠지.

그런 사람이다, 당주님은.

왜 단장까지 휘말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유가 있겠지. 당주님이 내리신 결정이니까.

페이가 동쪽을 내다본 후, 다시 린을 바라봤다.

페이

…린은 어렸을 때부터 남들을 우선시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걱정을 끼칠까봐 자신의 본심은 꽁꽁 숨겨두고는 했지.

그런데 이번처럼 자기 마음을 부딪치는 경우는 처음이다.

단장, 린과 무슨 일이 있었나?

나:

말하지 않으면

나: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그랬어.

페이

…그랬나? 그래서 그 린이…

하핫! 정말 오지랖이 넓군, 단장.

하지만 싫지는 않다. 전에 얘기했듯이 좋아하는 편이지.

마음에 들었다.

내 남자가 되겠나?

나:

갑자기?

페이

보면 볼수록 그대가 마음에 들거든.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으면 언젠가 또 만날 테니까.

그때 듣도록 하지.

알고 있겠지만 동쪽에 마을이 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 하루만에 NOA로 돌아가겠지.

그럼 나중에 또 만나지.

그리고 페이는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페이

…참 근사한 달이군.

동대륙에서 보던 것만큼이나 아름다워…

스토리 및 일러스트 © Studio B-Side. 비공식 열람용 아카이브입니다 — 문의나 요청은 사이트 소개 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